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주 Mar 02. 2024

잊혀진 디아스포라

중국 답사기 -2


우리 고대의 땅이었던 간도는 한 때 말갈이, 혹은 여진이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만주족의 땅으로 여겨진 적도 있었구요. 한민족들이 그곳에 거주한 지도 오래 되었구요. 누구의 땅이라고 선을 긋고 색을 칠할 수 없는 시기는 역사에서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이 땅을 탐하며 지도에 선을 그어대기 시작하면서였으니까요. 간도도 당연히 한민족의 삶터 중의 하나였을 테지만, 지금은 잃어버리고 잊혀진 땅이 되어버렸지요.


  인간은 대부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나고 자란 곳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특히나, 농경을 주업으로 삼았던 한민족에게는 말입니다. 눈을 뜨면,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익숙하게 펼쳐져 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주고받는 벗들이 항상 함께 하니까요. 구한말은 그런 이들에게 떠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안겨주었습니다. 누군가는 좀 더 나은 곳에서 더 나은 문물을 얻고자 떠났을 테고, 누군가는 기울어가는 나라가 심상치 않아 그 기울어짐에 주춧돌 하나라도 보태러 떠난 이들도 있을 겁니다. 또 누군가는 먹고살기가 막막하여 새로운 곳에서 땅을 일궈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자 떠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디아스포라(Diaspora), 민족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본거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여 생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수많은 한민족들은 민족 중심 거주지를 떠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독립운동이든, 배움이 되었든, 경제적인 이유가 되었든 말입니다. 무엇이 이유가 되든, 그들은 홀로 정착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반도를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정착한 곳 중 간도야 말로 가장 많은 한민족이라는 존재가 디아스포라의 상황으로 살아갔던 장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지금 옌벤조선족자치구라고 불리는 곳, 그 옛날의 간도지역이 아닐까 합니다.

연길공항 내 한글 병기 간판

조선족 자치구라는 말 그대로, 연길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한자와 한글이 병행된 빼곡한 간판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아닌 독특한 말투와 어법들이 나열되는 곳이지요. 지금은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수가 그 옛날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1920년대 간도땅에 정착한 조선인의 수는 중국인의 수를 몇 배는 능가하였으니, 또 다른 우리 민족의 터전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정규학제의 수업 시간,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물이 그득했다는 고대국가 중 옥저가 머물렀던 땅이 바로 간도인 게지요. 권력의 수탈을 혹은 제국주의의 수탈을 피해 농경을 업으로 하던 우리 민족이 터를 잡기에 가장 좋았을 땅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곳에는 우리 역사의 주인공들의 기록이 빼곡히 남아 있었습니다.

조선 제일의 천재였던 최남선, 사회주의 혁명가이며 아나키스트였던 김산, 역사 앞에 아직은 평가하고 싶지 않은 박정희, 한민족의 아픔인 윤동주와 송몽규, 그리고 수많은 기록되지 않은 혹은 기록되었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역사의 주인공들이 거쳐갔거나, 삶을 영위했던 곳이었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명동촌이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용정시내는 이상설, 이동녕 등이 설립한 서전서숙의 터가 지금도 또 다른 학교가 되어 사람을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중국 지린선 옌벤 조선족 자치주 허룽시 명동청(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보통, 터전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떠난 가족이나 민족의 존재는 그리운 가족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물론, 원치 않은 상황으로 떠나야 할 때가 더 많았겠지요. 따뜻했던 삶의 보금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다시 돌아가기 버거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그들은 언제든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도움이 되고자 기꺼이 힘을 보태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들을 껴안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서전서숙 옛 자리(현재 룡정시실험소학교)

 과연 우리는 이곳을 지나간, 이곳에 터전을 잡은 이들에게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우리는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명칭 합니다.


체제의 단절로, 국교의 단절로 반세기 가까이 단절되었던 그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진지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가 그러했듯 사람이기에 돈을 벌어야 해서 혹은 좀 더 나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나고 자란 이곳이 정녕 그리워서 등의 이유로 한반도라는 본연의 고향으로 돌아오고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 떠나 간도든, 연해주든, 세계 어느 곳이었든 도착하였을 때 그들을 맞아주고 환영해 주는 이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감정을 고취하여 사고해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기에 어디에서나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민족이 어떠하든, 출신국가가 어디이든 동등한 대우를 받고, 이동하고 거주할 수 있어야 하며 박해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그곳에서의 시작도 차별과 배제였음이 너무나 분명한데, 지금의 고향에 돌아온 그들에게도 ‘평등’함이라는 단어는 배제되어 있어 보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존재하는 범죄에 대해 ‘조선족‘에 의한 범죄라고 단죄되고 특정됩니다. 여느 동네를 가면 ’ 조선족‘이 많아 위험하다고 합니다. ’ 조선족‘아이들이 많은 학교라 아이를 보내기 싫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가 발생한 이유가, 스스로가 원해서가 아니라 전쟁과 박해, 혹은 인종 대청소를 피해서였습니다. 우리의 디아스포라 역시 그러했을 것이지요. 기본권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국가가 사라져서 주권을 잃어버린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학살과 차별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서 저 멀리멀리 나가야 했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우리 땅을 떠났던 이주민중 서구에 있는 이들과 또 이곳 간도에 있는 이들이 분명 우리에게서 차별받아야 하는 것까지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아닌 수많은 차별을 이미 경험한 그들의 역사에 지금의 우리마저 차별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아야 한다는 것만 기억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이 만주로 간 까닭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