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 로물루스를 통해 보는 미래세대의 자맥질
식민지 행성에서 살아가는 레인과 그녀의 인조인간 동생인 앤디는 기업에 의해 착취 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레인의 구렁텅이 같은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그녀가 한번도 보지 못한 태양이 뜨는 행성이자 낙원으로 알려진 이바가 행성으로 이주에 대한 꿈이다. 어느날 그녀의 가족 같은 친구들이 버려진 우주선 속 이바가 행성으로 가는 연료와 동면포드를 찾게 되자, 레인과 그들은 이바가 행성으로 가는 꿈과 부모세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일념을 간직한 채 버려진 우주선으로 향하게 된다. 그 우주선에 어떤 위험이 닥치고 있을지 모른채...
카라칼라
에이리언 시리즈 속 상징적인 대사인 완벽한 유기체는 영화 속 괴물인 제노모프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완벽한 유기체라는 단어는 에이리언 속 괴물뿐만 아닌 시리즈 영화마다의 테마를 요약하는 포괄적인 단어와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프로메테우스시리즈 속 “완벽한”유기체는 교만한 창조주의 미래를 예견하는 말로서 쓰였던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번 영화 속에선 이러한 완벽한 유기체라는 목적하에 자본가 계급에 의해 소비되는 노동자 계급 착취를 설명하려 한다. 로물루스에선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을 기성세대와 미래세대로 나타낸다.
영화 속 기업인 웨이랜드유타니는 자신들의 원대한 목적을 위해 미래세대를 착취하며 그들의 착취를 궁극적 목표를 위한 당연한 희생을 치부시한다.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아도르노의 저서인 계몽의 변증법 속 구절이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서저를 통해 계몽주의라는 인간 해방 정신이 궁극적으론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적 이성의 장치로 기능한다고 서술하였다. 아도르노는 인간의 이성이 발전함에 따라 자연이 공포의 대상에서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어겨지기 시작하면서,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자연을 이기기 위해선 인간을 단결해야 했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 계몽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인간을 결속화 하며, 인간을 도구화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현대사회 속 계몽은 합리성과 이성만을 강조한 채 등장한 개념이다. 그러기에 자연스레 합리성과 이성은 획일화 된 보편성만이 옳은 판단이라 이어졌으며, 이러한 계몽은 자연스레 지배계층들이 노동계층을 하나의 계몽이라는 목표하에 착취함에 용이해졌음을 서술한다. 에이리언 시리즈 속 우주 식민지에서 우주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되지 못해 도태될 위험이 있는 인간에게 완벽한 유기체로의 진화를 이끌며, 그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웨이랜드유타니 기업은 이런한 계몽의 도구적 사용을 잘 설명한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영화 속 주인공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젊은 미래세대들이며, 그들은 기성세대부터 이어진 이러한 억압적 상황 속의 반발심을 느낀다. 영화의 메인플롯인 버려진 우주선으로의 여정의 출발 또한 자신의 꿈이라는 목표보단 부모세대와 다른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그러나 작 중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들은 부모세대와 다른 선택을 하였음에도, 결과적으론 똑같은 길을 걷게 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인 비요른은 이러한 점을 잘 부각 시키는데, 극 속 언급에 따르면, 비요른의 부모는 흔히 말하는 트롤리딜레마 속 다수를 선택한 인공지능에 의해 희생당하게 된다. 영화 중반 나바로가 페이스허거(영화 속 기생괴물)에게 당해 인공지능인 앤디는 다수를 살리기 위해 나바로를 제거하려 하자, 비요른은 그녀를 앤디에게 벗어나게 해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타파하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면서 어쩌면 당연하게도 페이스허거에게 당한 나바로이기에, 비요른의 선택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며, 소수의 편에 노출된 자신마저 제노모프에게 희생당하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가 부모세대와 다른 선택을 하고도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회학자인 자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설명하였다. 그는 사회가 개인을 규정하는 구조를 통해 운명적으로 반복되는 행동패턴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 속 개인은 자율적인 선택을 가질 수 있지만, 실제론 사회적 기대 및 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선택지가 협소해지며, 그로 인해 실질적으론 부모세대와 다를빠 없는 결과를 만들어낸 다는 점을 설명한다. 개인이 다르게 살고자 노력해도 결국 동일한 구조적 압력에 의해 미래세대는 부모와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부모와 다른 선택을 하여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지만 구조적(외부에선 기업의 착취, 우주선에선 제노모프 같은 괴물들)인 문제로 결국 다른 삶을 살고자 했던 그들의 꿈은 좌절된다.
그렇담 우리는 그저 낙담하여야 하며, 변혁은 그저 하나의 몽상인걸까? 살면서 한번도 보지 못한 태양을 꿈꾸는 레인은 그저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인걸까?
아우구스투스
억압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꿈을 꾸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의 자유 즉 존엄성과 연결되있다. 우리의 자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근대 사회에서의 자유란 개체의 자유이다. 여기서 개인이 아닌 개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체란 수 없는 분열 속에서도 분할 될 수 없는 어떠한 존재를 뜻한다. 즉 개체란 어떠한 억압 속에서도 분할을 잃지 않는 존엄성을 가진 것을 뜻하며, 고로 개체는 주체를 뜻한다. 이 주체는 당일성과 동일성을 유지해야 주체라는 개념을 잃지 않게 된다. 서양에서는 반종교적 흐름으로서 하나의 정신이 곧 하나의 주체다라는 개념이 확립되면서 곧 신적인 존재에도 굴복하지 않는 존재를 진정한 주체 즉 자유를 지닌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서술 속 결국 자유란 어떠한 압제에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인 것 이다. 자유는 압제 속 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억압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꿈을 꾸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다.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억압의 구조를 넘어 스스로를 주체로서 확립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실천적 행위이다. 이상을 꿈꾸는 행위는 우리 스스로가 자유로운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 이며, 우리는 우리의 변혁을 위해 이상을 꿈꿔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