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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Jun 12. 2022

태어나서 처음으로 - 6. 불편한 안정감

23살, 난생처음 홀로 떠난 교환학생

https://youtu.be/YFQEa--KXHE

오늘의 영상




대학에 와서 내가 첫 번째로 교수님께 한 질문이 있다.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계급 또는 계층의 차이를 줄이고 싶다는 생각에 사회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를 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저 역시 사회 계층의 재생산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노력이라고 포장된 것들 속에는 사실 경제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저는 고로, 자본주의 사회의 계층과 계급의 산물일 뿐인, 소시민이라고 인식됩니다. 이런 자괴감을 교수님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교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도움과 배경을 인정하되, 이것이 더욱 견고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말랑한 계층을 만드는 것이 우리 같은 작은 사람들의 1차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노트에 적었다. 바야흐로 4년 전인 이 새내기 김세현의 질문이 떠오르는 이유는, 내가 과연 그런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해 왔는지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도착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사람도 언어도 아니다. '자본'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였다. 돈에 대해 솔직하고, 그래서 노골적인 문화에 질겁했었다. 너무나도 상업적이고, 그래서 저급하다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 그렇다.


부모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마음 편히 미국에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겠지-) 비행기 값, 비자 발급 비용, 기숙사 비용, 생활비, 여행 비용 등 수많은 지출 내역만 봐도 알 수 있다.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문화에 흡수되어, 지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누리고 있었다. 문제인 것은, 새내기 때의 죄책감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를 얻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사회적 계층을 강화하는 것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계, 유리처럼 단단한 계급의 차이를 랩처럼 만들겠다는 결심은 약해진 지 오래였다. 나의 노력은 나의 배경에서 오는 이점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포장지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무리 모든 것에 무뎌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지만, 이 내용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약하고 예민해서 (그나마) 착하던 새내기의 나를 기억해내려고 무던히 애쓰는 중이다.


아래의 영상에는 킹이 클 샌델 교수님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세상 쓸데없는 영상만 보는 나지만, 과제에 첨부할 영상을 찾은 기록 때문인가 갑자기 이런 똑똑한 영상이 내 유튜브 홈에 등장했다. '메리트의 횡포'라는 제목이 오싹했다. 혜택과도 같은 '메리트'라는 단어가 나의 삶을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혜택 속에서 불만을 가지던 나도, 자기 연민에 빠져 공감을 잊던 순간도. '원칙 외의 보상'을 누리는 삶이라면, 적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그로 인한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원죄에 대해 작게라도 값을 치르는 일이겠거니-. 그래서 '이 예민한 감수성을 잊지 말아야지-. 이 교수님은 백발이 될 때까지 안 잊으시는데, 고작 23살에 잊어선 안된다'라고 주문을 걸면서 영상을 시작했다. 구구절절 맞는 말에 고개를 한 100번 끄덕이니 영상이 끝이 나더라. 영상을 보고 나서는 반성했다. 수업 시간에 떠들다가 혼났을 때처럼, 그냥 자연스럽게 반성했다. 내가 잘못한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고, 영상의 내용이 너무 당연해서다. (사회학은 원래 당연한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학문이므로)


당연히 이 사회의 미묘한 세습은 줄어들어야 한다.


번쩍이는 금화가 아니라, 문화적 자본으로 세습되어 눈에 띄지 않는 사회. 피라미드는 점점 더욱 견고 해지지만, 그 과정은 목격되지 않는 사회. 투명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무서운 상황. 모든 것이 복잡하고 피곤하고 미묘해진 지금의 사회. 이런 곳에서는 착하게 살기도 어렵고, 나쁘게 살기도 어렵다. 나쁜 의도를 가져도 그 상징을 미묘하게 변화시켜야 하고, 착하게 살려면 그 나쁜 의도들을 해독해야 하기에. 그저 내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멍청함을 방패로, 쉽게 생을 향유하는 것(어쩌면 그저 즐기는 것이 당연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착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음표를 띄게 한다.


그래서 기왕 어려운 삶, 최대한 착하게 살아보자고 작게 결심했다. 나의 죄의 무게를 느끼고, 반성하고, 변화를 도모하자. 편하게 살아선 안된다.


https://youtu.be/Qewckuxa9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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