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것들》 — 관능은 육체의 쾌락이 아니라, 존재의 해방이다
관능은 단지 육체의 쾌락인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더 깊은 층위와 연결된 언어인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2023)은 이 질문을 근본부터 흔든다.
이 영화는 단순히 기묘한 러브스토리도, 자극적인 성적 모험담도 아니다.
벨라라는 한 여성의 “재탄생”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운 주체로 성장하고 해방되는가를 보여주는 철학적 실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실험의 중심에는, 몸을 내던진 배우 엠마 스톤이 있다.
영화는 기괴한 공간에서 시작된다.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케 하지만, 건축물은 과장되고 색채는 왜곡되었으며 인물들의 언행도 불협화음을 낸다.
이 낯선 무대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에서 관능의 또 다른 차원이 열린다.
푸코가 말했듯, 규범은 권력의 산물이다. 《가여운 것들》의 무대는 규범의 장치를 뒤틀어, 인간의 삶이 얼마나 인위적인 규칙 속에 길들여져 있는지를 폭로한다. 이 세계에서 벨라의 존재는 곧 규범을 거부하는 실험체가 된다.
줄거리는 기묘하다.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는 스스로 생명 실험을 감행한다. 자살한 임산부의 몸에 태아의 뇌를 이식하여 다시 살려낸 것이 벨라다.
그녀는 성인의 몸을 지녔으나, 언어도 규범도 모르는 아기의 정신을 가진 채 태어난다.
처음의 벨라는 서툴고 무지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운 속도로 세상을 흡수한다. 그녀의 호기심은 먹는 것, 걷는 것, 대화하는 것, 그리고 성적 탐험에까지 닿는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자유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벨라는 그 누구보다도 급진적인 방식으로 이 자유를 실천한다. 욕망을 억누르지 않고, 선택을 주저하지 않으며, 실패와 상처마저 실험으로 삼는다.
벨라는 어린아이처럼 본능에 충실하다가도, 점차 세상과 부딪히며 성숙해 간다. 그녀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단순한 쾌락을 넘어,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정의하고자 한다.
보부아르의 말처럼,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벨라는 바로 그 과정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타인의 규범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선택을 통해 주체로 거듭난다.
그 여정에서 성적 자유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억압을 전복하고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과정으로 자리잡는다. 관능은 쾌락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 된다.
이 영화는 곧 엠마 스톤의 영화다.
그녀는 벨라를 연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벨라가 되었다.
엠마 스톤은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울고, 웃고, 욕망하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벨라의 몸짓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었다.
단순한 노출보다 더 대담한 건, '쭈뼛대지 않는 태도'였다.
관객 앞에서 한 인간이 부끄러움의 껍질을 벗겨내고, 존재를 정직하게 긍정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그녀의 연기였다.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사랑스러운 배우”로 각인된 그녀는, 이 작품에서 완전히 다른 배우로 재탄생했다. 귀여움 대신 처절함, 안전한 매력 대신 위험한 해방. 《가여운 것들》은 그녀의 기념비적 도전이다.
《가여운 것들》이 제시하는 관능은 단순히 에로틱하지 않다. 그것은 존재의 실험이며, 자유의 실천이다.
벨라는 몸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욕망을 통해 자신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관능은 쾌락을 넘어선다.
관능은 이제, 인간이 자기 삶을 스스로 규정하는 실존의 언어가 된다.
《가여운 것들》은 토요일밤의 관능 시리즈에 전환점을 남긴다.
관능은 더 이상 아름답고 달콤한 유혹이 아니다.
이제 관능은, 인간이 자유를 긍정할 때 드러나는 실존의 몸짓이다.
엠마 스톤은 이 영화에서 배우로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연기하지 않았고, 존재했다. 그녀는 벨라였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외면해 온 자유의 본질이었다.
우리는 불편하면서도 경외심을 품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관능은 육체의 쾌락이 아니라, 존재의 해방이다.
이미지 출처: 창작 일러스트 (비상업적 감성 콘텐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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