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내고 춤을 추는 사람과 돈을 받고 춤을 추는 사람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by 진인철

대학교 1학년, 갓 입학한 풋풋한 신입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선배들의 부름을 받아 처음 가보는 ‘나이트’라는 곳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요즘 말로는 클럽이라고 부르겠지만, 그땐 빠르고 강한 디스코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춤을 추는 그런 공간을 ‘나이트’라 불렀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온몸을 덮쳐오는 저음의 진동,
리듬보다는 충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그 베이스 사운드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어깨만 들썩이다가,
어느 순간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정신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그저 기분 가는 대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구 흔들던 몸이
어느 순간 멈춰졌던 건, 눈앞의 무대에 시선이 고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높은 무대 위에서 박자에 맞춰 완벽하게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 멋졌고, 동시에 부러웠다.
나는 이 넓은 공간에서 제일 못 추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리듬이 있었고, 몸짓이 있었고, 자신감이 있었다.


쉬는 시간, 선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형, 나도 저렇게 추고 싶어요… 멋있더라.”
그러자 선배는 웃으며 짧게 말했다.
“야, 넌 돈을 내고 춤을 추고, 쟤네는 돈을 받고 춤을 추고 있잖아.”


그 한 문장이 이상하게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긴 잔향처럼 오래 남았고, 살아가면서 그 의미가 점점 더 깊어졌다.
그 순간에는 그저 신입생의 철없는 말에 형이 웃으며 던진 농담일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문장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조건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이 글은 그 한 문장에서 출발한 사유의 기록이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대가’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행위의 동기와 목적이 점점 ‘외부’로 향하고,
그 행위가 나에게 가져다줄 결과물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춤은 그 자체로 리듬의 표현이며 자유로운 감정의 표출이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술이 되고, 직업이 되고, 상품이 된다.
그 순간 춤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퍼포먼스가 된다.

철학자 하버마스는 현대사회를 "도구적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효율적인가’를 우선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심지어 소통과 예술, 감정조차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춤도, 글도, 말도 — 보여주기 위한 것, 설득하기 위한 것, 인정받기 위한 것이 된다.
내가 나이트에서 흔들었던 춤이 비틀리고 서툴렀어도
그건 어쩌면 가장 ‘내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자발적 움직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활동’, 즉 자족적 행위에서 찾았다.
어떤 외적 보상이나 효율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선택되고 사랑받는 행위들 —
춤, 철학, 사유, 우정, 놀이 같은 것들이 바로 그 예다.


그는 말했다.

“자족적인 삶은, 그 자체로 선택될 가치가 있는 삶이다.”


돈을 받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가 주는 내적인 기쁨과 충만함에서 비롯된 삶,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점점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으로부터 소외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 반복되며 ‘성과’로 평가되고,
그 대가가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되면
우리는 본래 그 행위로부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돈을 받고 춤을 추는 삶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돈 없이도 춤을 출 수 있는 자유,
그 누구의 시선도 평가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내적인 리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 삶의 무대’ 위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고 불렀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는 우리가 매일 어떤 행위를 하든
그 행위의 근저에는 반드시 “나는 왜 이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는 무대 위가 아니라, 그 무대를 바라보는 자의 물음 속에 있다고 그는 본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왜 이 춤을 추고 있는가?


✨ 삶이 무대가 되면, 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삶이 리듬이라면, 누구의 평가도 없이 나만의 박자에 따라 흔들 수 있다.

오늘, 당신은 리듬 속에 살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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