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도 엔트로피가 있더라
오랜 친구들과의 모임이 줄어들자, 어느 날 문득 ‘엔트로피’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있던 카카오톡 단체방은 1년 넘게 읽기만 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고, 가끔 올라오는 “잘 지내세요?” 한마디도 예전만큼 마음을 울리지는 않았다. 모임이 없어졌고, 대화는 뚝 끊긴 것도 아닌데도, 왠지 각자 흩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별히 서운한 일도 없고, 누군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 감정을 곱씹다 보니, ‘관계에도 엔트로피가 작용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엔트로피는 원래 물리학 용어다. 닫힌 계(system)에서 무질서도가 점점 증가한다는 개념.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 사이에도 그런 흐름이 있다.
“방치된 관계는 자연스레 흐트러진다.”
이 단순한 법칙이, 내가 겪은 관계 변화의 핵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나만 느끼는 걸까? 아니다.
“사회적 엔트로피(Social Entropy)”라는 개념이 실제로 심리학과 사회학 연구에 등장했다. 2020년 Social Science Research에 발표된 종단 연구에서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면 일정 수준의 관심과 감정적 투자가 필요하며, 그 에너지가 사라지면 관계는 점점 무질서해지고 결국은 소멸한다고 분석했다.
통계적으로도, 한 해 동안 대화나 만남이 없던 친구 관계는 다음 해까지 70%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주 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아, 끝났구나’ 하는 감정이 불쑥 찾아온다.
이것은 곧 관계가 단절이 아니라 서서히 흐려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소멸’이 아니라 ‘산란’이다. 나도 모르게 멀어지고, 마음의 선이 엷어지고, 어느 날엔가 다시 연락을 걸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마치 사진이 조금씩 빛바래듯, 사람의 온기마저 색을 잃는 듯하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2019년 한국사회학회 논문집에서는 직장 동료 간 관계 유지를 조사했는데, 이직이나 주거 이동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관심의 소멸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
“바쁘다.” “나중에 보자.” “이번 주는 좀 힘들어.”
이런 말들이 쌓이고, ‘나중’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영원히 없음’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관계 속에 흐르는 작은 관심의 줄기가 끊기면서, 무질서가 시작된다.
나의 경험도 그랬다.
몇몇 친구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르다 보니, 어느 날 “다시 연락해도 되나?”라는 문장이 마음속에서 멈칫거렸다. 가까웠던 사이인데도, 새삼스럽고 어색했다. ‘시간이 흘렀으니 괜찮겠지’가 아니라, ‘이젠 늦었나?’ 하는 불안감이 앞섰다.
이게 바로 관계의 엔트로피였다.
반면, 꾸준히 소소한 메시지나 안부 전화를 나눈 친구들과는 그 어떤 틈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이야기의 연장처럼 편안했다. 톡 하나, 사진 하나, 짧은 이모티콘 하나가, 그 사이에 놓인 ‘무질서의 가능성’을 막아주는 작은 닻이 되어주었다.
어떤 사람은 “관계 유지도 노동이다”라고 말했다. 맞다.
연락 한두 줄 쓰는 일조차 노력 없이는 줄어든다. 감정 에너지를 써야 하고, 때론 귀찮음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그 노동이 결코 나를 외롭게 만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노동이야말로, 관계가 흐트러지기 전에 살짝 주워 담는 지혜다.
정리되지 않은 관계도, 작은 노력으로 다시 따뜻한 물결을 타게 된다.
며칠 전, 오랜 친구에게 케이크 사진과 함께 이렇게 보냈다.
“작지만 너 생각났어. 잘 지내?”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아, 고맙다. 잘 지내. 조만간 차 한잔하자.”
내 가벼운 메시지가, 관계의 엔트로피를 멈추는 작은 장치가 된 느낌이었다.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가, 흩어지는 사이를 조용히 봉합하고 있었다. 그건 거창한 의무가 아니라, 마음을 담은 소소한 노력이었다.
관계에도 엔트로피가 있다면, 작은 관심과 투자가 그것을 막는다 — 그렇게 우리는 우리 주변의 관계를 소소하게 가꾸며, 잔잔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
✨이 글은 《나이 먹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의 일부 챕터입니다.
기획출판을 준비 중이며, 브런치에서 선공개로 일부 챕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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