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수지 Feb 11. 2024

고양이 탐정을 아세요?

동아줄 같은 직업

‘고양이 탐정’이라는 직업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땐 셜록 홈스의 탐정 모자를 쓴 고양이가 떠올라 귀엽다고 생각했다. 실은 고양이가 탐정이 아니라, 가출한 고양이를 찾아주는 사람을 고양이 탐정이라고 한다. 신기하고 재밌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일의 필요성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어떤 방식으로 ‘수사'가 진행되는지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친구 집을 방문했고, 시간을 보내다 다음 날 돌아갈 계획이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친구가 오더니 고양이가 안 보인다고 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속으로 ‘어디 숨어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둘러 일어나 같이 집 안을 둘러봤지만 없었다. 집 안에 없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자 대체 어떻게 나갔는지에 대해 초점이 맞춰졌다.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주택 1층이었다. 늦은 밤 내가 바람 쐰다고 뒷문을 열고 잠시 나갔다 왔고, 그때 나간 것으로 추정되었다. 내 발 사이로 고양이가 빠져나갔는데 내가 그걸 몰랐다고? 그게 말이 되나? 내가 그렇게 부주의한가? 어디 숨어있는 거 아닐까?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집에 없는 건 확실했다. 밤 사이 문을 연 건 나밖에 없으니 내가 도주로를 제공한 공범이었다.


오전 8시 조금 넘은 시간에 잃어버린 녀석을 찾으러 집 밖으로 나섰고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순한 녀석이라 어느 구석에 숨어있겠거니 했다. 비슷한 형태의 주택이 몇 채 있는 번잡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숨을 곳이 많지 않겠구나 했지만, 막상 나가보니 휑뎅그렁한 느낌이 들어 막막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고양이 탐정을 검색하고 전화를 했다. 친절하게 상황을 물어봐주시고, 어디쯤을 찾아보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곧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순진하게도 또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의 눈이 아닌 고양이의 시선으로 어디에 몸을 숨기는 게 좋을지 고심하며 이곳저곳을 뒤졌다. 평소 바라보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탐정의 조언을 따라 그쪽을 집중적으로 져보았다.


햇살은 따가웠고, 입안은 바싹 말라갔지만, 수색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친구나 나의 목소리를 듣고도 두려운 마음에 울지도 못하고 그저 자기를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아서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바닥에 엎드려 차 아래를 살펴보고, 거미줄을 헤치며 관목들 사이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 다니면서 애타게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초록색 잎들 사이로 흰색의 고양이 털이 보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친구얼굴에서 점점 핏기 사라졌다. 평정심을 잃어가는 게 보였지만, 어떤 말도 섣불리 건넬 수가 없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친구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참담했다. 더 늦기 전에 고양이를 찾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질 시간이 되었다. 어두워지면 수색이 힘들어지기에 더 조바심이 났다. 친구는 그사이 고양이 탐정 한 분을 집으로 불렀고, 늦은 시간에 도착 예정이었다.


나도 그사이 출장 가능한 분을 찾느라 고양이 탐정 몇 분과 통화를 했다. 가출 후 보이는 행동 패턴이 고양이의 나이, 성격, 가출 경험, 스트레스 유무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예민하고 겁이 많은 애들이 집 근처 어딘가에 숨어서 패닉에 빠져서 꼼짝 안 하고 보호자의 목소리에 반응을 안 보이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사교성이 좋고 겁이 없는 애들이 멀리 간다고 했다. 간혹 주차된 차의 엔진 룸에 들어가 그 차에 실려서 어딘가로 가기도 한다고 했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렇게 되면 영영 못 찾을 것 같았다. 나중에 후기를 뒤져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찾은 경우도 있었다. 


시간은 늦었고 결국 고양이는 찾지 못했고, 친구의 불안과 초조함은 극에 달해있다가 그것조차 초월해 버린 상태가 되었다. 내가 너무 부주의했다고 염치없는 사과를 하며 어떻게든 찾자고 다독였다. 근처에 있을 것이라고,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아니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 한구석에 혹시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꺼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드디어 고양이 탐정이 도착했고, 대략적인 계획을 얘기해 주셨다.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겨서 나가더니 십 분쯤 뒤에 고양이를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거짓말하는 줄 알았다. 친구가 부랴부랴 먹을 거랑 가방을 가져가서 애를 확인하고 불러서 가방에 넣어서 집으로 데려왔다. 건물 뒤편을 유유히 걸어가는 걸 보시고 전화를 하신 거였다. 우리는 12시간을 찾아 헤맸는데, 고양이 탐정이 온 지 십 분 만에 고양이가 나타났다. 직접 겪지 않았으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일이다. 그렇게 24시간의 가출은 마무리되었다. 돌아온 녀석은 다친 곳도 없었고, 평화롭게 밥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마치 즐겁게 동네 산책을 다녀온 것같이 느껴졌다. “내가 알아서 놀다 들어왔을 텐데 왜 걱정하고 그래?” 이런 느낌? 대체 어디서 뭐 했을까?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감정의 낙차가 이 정도로 큰 하루는 처음이었다. 잠이 들 때까지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가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고양이를 찾아서 기뻤고, 친구 얼굴을 웃으며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요새도 문득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평온한 하루들이 그때 고양이를 찾아서 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돌아온 고양이가 두 사람 목숨을 살렸다고 했다. 못 찾았다면 친구는 물론이고 원인 제공을 한 나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만약 못 찾았다면, 집을 나간 녀석이 나이 들어 이 정도면 죽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다시 한번 돌아온 고양이에게, 녀석을 찾아준 고양이 탐정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유괴당한 부모들은 이사를 가지 못한다고 한다. 실종이 죽음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희박하더라도 돌아올 가능성이 남아있기에 이사를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기다림의 삶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그 순간에 머물게 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장 슬픈 이별은 실종일지도 모르겠다. 반려동물과의 이별에 실종이 있다는 것을 이 일 이전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앙꼬를 잃어버린다면, 나는 어떨까를 여러 번 상상해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마주하는 것은 검은 벽뿐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서 생각이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상상하는 것조차 너무 두려워서 굳게 닫아버릴 것일 수도 있다. 애들 밥을 챙기고, 공을 던지고, 깃털을 흔드는 평범한 일상이 큰 행복이라는 것을 어리석게도 이런 일을 통해서 체감하게 된다.



어린아이를 비롯한 사람의 실종은 공공성을 띄고 있어, 경찰에 신고하여 수색을 요청하고 경우에 따라 다른 기관의 도움도 요청할 수 있지만 반려동물 실종의 경우는 오로지 개인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실종 보호자로서 경황이 없는 와중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과 함께라면, 서로 의지하며 해결책을 찾아보기가 그나마 수월하지만, 혼자라면 그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고양이 탐정은 그럴 때 든든한 동아줄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서평> 사는 동안 행복하게 - 손서영 지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