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흔히 사람의 1년이 그들에게는 6년에 해당한다고 본다. 계산해보면 앙꼬는 진작에 내 나이를 추월했고, 비비 파이는 나와 비슷한 또래다. 어릴 때 사진을 들여다보면 얼굴선이 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작고 귀여운데 곧 나보다 나이가 많아진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들 종의 시간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반려동물의 노화를 목격하게 된다. 작은 소리만 들려도 짖던 녀석들이 언젠가부터 집에 들어와 흔들어 깨워야 깜짝 놀라며 일어난다거나, 다리를 절거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지고, 움직임이 둔해지는 등 사람의 노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변화들이 우리의 반려동물에게도 찾아오는 것이다.
사람의 치매와 비슷한 ‘인지기능장애’가 노령 동물에서 나타나면, 보호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강박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몇 시간씩 한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다가 허약한 뒷다리 때문에 걷다 쓰러진다. 그럼 다시 일으켜달라고 짖고, 일으켜 세우면 또 정처 없이 원을 그리며 돈다. 보다 못한 보호자가 뒷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바퀴가 두 개 달린 보조기를 구입해서 채워주면 그 마음을 알아서인지 열심히 원을 그리며 돈다. 집 모서리 어딘가에 머리를 박은 채 뒤로 몸을 빼지 못하고 하루 종일 씨름을 하다 녹초가 되거나, 새벽 시간에 이유 없이 짖기도 한다. 새벽에 몇 시간씩 짖으면 그를 달래기 위해 온 가족이 일어나게 되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출근한다. 가끔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가족을 위해 개에게 수면제를 처방하기도 한다. 나이든 반려동물의 일상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제 그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따뜻하게 눈을 맞추고 서로를 이해하는 눈빛을 교환하는 일은 사라졌다. 설사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령 그것을 알고 따라준다 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생의 마지막 돌봄에는 많은 고민과 선택의 시간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앙꼬에게도 노화의 징후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기도 했다. 새로운 간식을 먹으면 소화를 못 하고 토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건사료를 씹을 때 전처럼 ‘까다닥 까다닥’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제는 적당히 씹고 삼키는 것이다. 경쾌한 걸음걸이 대신 뒤뚱거리는 자세로 걷고, 예전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고, 의자 위로 도움닫기를 해야만 식탁에서 내려올 수 있다. 싱크대고 옷장 위고 가리지 않고 올라가던 앙꼬는 이제 없다. 가끔은 예전에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한때는 고양이의 신비로움과 사랑스러움을 관찰하고 감탄했다면 이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앙꼬의 생명을 살피고 감시하게 됐다. 물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지, 변이 형태는 있는지, 소변 양이 줄어들거나 늘어난 건 아닌지, 사료는 적당한 양을 먹는지 등등. 노화의 증거는 있었으나 밥도 잘 먹고, 의사 표현도 잘하고, 마중도 잘 나오는 앙꼬를 보며 언제까지나 이 시간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앙꼬는 “15살이지만 건강해요”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혹은 자랑스럽게 하곤 했다. 하지만 16살이 되자 그 말을 뱉는 게 조금 석연치 않아졌다. 정말 괜찮은 걸까?
마음 한편에서는 ‘당연한 일이야. 노화는 세상 누구도 빗겨갈 수 없어’ 하고 혼자 되뇌기도 한다. 내 생각의 알고리즘은 늘 이런 식이다. 많은 동물들을 봐왔기에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가, 앙꼬를 보면 전혀 이해가 안 가다가 마지막엔 억지로 이성과 지식의 끈으로 마무리를 지어보려고 한다. 어쩌면 수의학적 지식을 내려놓고 가족과의 작별을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태도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앙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리는 것.
앙꼬와 비슷한 나이대의 고양이가 병원에 오면 다들 심각하게 아팠다. 남의 일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직장에서의 일이라 어둠의 그림자가 집까지 드리우진 않았다. 그러다 친한 언니의 20살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종종 얼굴을 보던 녀석이었는데 떠났다고 하니 베란다로 어둠이 성큼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앙꼬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하지? 마치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야기처럼 낯설었다. 검은 장벽이 다음 생각을 차단하는 것 같았다. 보호자들에게는 그렇게 준비를 해야 한다고 떠들면서 정작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보호자에게 말은 참 잘했다. 힘들지만 준비해야 한다고, 나이가 들면 그런 거라고, 언젠가 보내줄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떠들었다. 물론 진심으로 그들에게 힘이 되고자 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그 순간들로 돌아가 내 입을 꿰매고 싶어진다. 솔직히 말하면 수의사이자 보호자인 나는 더 불안하고, 더 무섭고, 아무런 준비도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