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어느 요양원에 사는 고양이 오스카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침대에 찾아가 임종을 지켜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로, 이를 다룬 책 <고양이 오스카>에 따르면 오스카와 함께 일하는 요양원 직원들은 ‘때가 되면’ 환자의 가족에게 전화를 한다. 이것이 오스카만의 재능은 아닌지 다른 요양원에도 죽음을 예측하는 개나 고양이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어떻게 때가 됐다는 것을 알까? 여러 가설 중 하나는 동물이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를 냄새로 알아채 죽음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훈련을 통해 특정 암을 탐지하는 동물이 있으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다. 과학적 입증이 어렵다고 해도 오스카는 분명 사람의 죽음을 아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동물이 자신의 죽음 또한 인지할 수 있을까? 많은 환자를 봐왔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얼마 전에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입원했었다. 하루 한 번씩 수혈을 해야만 했고, 수혈하기가 무섭게 빈혈 수치가 낮아졌다. 호흡이 가쁘고 식욕도 없었다. 보호자가 면회를 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많이 안타까워하던 보호자는 며칠간 이어진 치료에도 호전 반응이 뚜렷하지 않자 아이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안락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자기가 왜 아픈지, 왜 고통을 겪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상황이 너무 잔인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럴 때 수의사로서 고민이 깊어진다. 안락사는 이미 죽음이 확실한 경우에 불필요한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은 언제나 어렵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회복할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해서 내가 환자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언제나 확신할 수 있을까? 치료가 어려워 보였던 환자가 가까스로 회복하여 퇴원하는 경우도 있고,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극적으로 회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나의 선택이 남은 삶을 빼앗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다.
고통이 어느 순간부터 불필요한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더 이상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순간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을까?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은 그동안 많이 달라졌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개를 어떻게 집 안에서 키우냐고 했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반려동물이 실내에서 생활하고, 그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좋은 음식을 주고, 높은 치료비 부담을 감수하고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당연시될 만큼 보호자의 의식도 성장했다.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 많이 변해 보호자 대부분이 반려동물 사후에 개인 화장을 할 것이라고 응답한 설문 조사도 종종 접한다. 그러나 치료 과정에서만큼은 사람 환자와 동물 환자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에 언급한 상황처럼 동물 환자 스스로가 치료에 대한 의지를 표명할 수 없기에 딜레마가 생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부분을 예측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도 정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반려동물이고, 우리는 그들의 반려인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수의사들은 보호자에게 말기 암 환자처럼 더 이상 치료 반응이 없고, 고통이 극심한 경우 안락사를 선택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지만,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믿어왔다. 그 선택이 참으로 무겁다는 걸 알기에 숙연하게, 또 예의를 다해 보호자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안타깝지만, 아픈 동물에게도 보호자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안락사를 막으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이 또한 어려운 일이지만 먼저 말을 꺼낸 보호자를 설득하기 위해 다만 애쓸 뿐이다. “사람이라면 우리가 이런 고민을 했을까요? 생명은 다 살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이 안락사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으며,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금의 시간을 주세요. 안락사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니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때때로 여기에 한마디를 더하기도 했다. ‘보낼 때’가 오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듣기에는 따뜻하고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때가 되어도 모를 수도 있고, 그런 때라는 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의사는 반려동물의 죽음에 보호자와 함께 참여하는 존재이기에 그 과정에 책임이 필요한데, 과학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비겁한 말을 해왔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비비가 미끄러져 다리를 삐끗했고, 다리를 절었다. 며칠 동안은 그렇게 좋아하는 공도 외면했다. 그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고, 안쓰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셋 중 하나가 숨을 거칠게 쉬고, 하루 중 단 몇 시간도 편히 잠을 잘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면, 나역시 안락사를 떠올릴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혹시 나를 위한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내가 보기 힘든 것은 아닐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잠시라도 가족들을 봄으로써 그 시간이 참을 만한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또는 저 작은 몸 깊은 곳에서 회복의 싹이 움트고 있는데 힘들어 하는 그들 모습에 지레 겁을 먹어버리고 못 본 것은 아닐까? 한없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살고 싶어 하는 게 생명체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생사의 장벽 앞에 서는 것은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힘든 일이다. ‘안락한 죽음’이 가능하다는 것은 혹시 우리가 가진 환상이 아닐까? 종종 영화에서 차에 치인 사슴이 가쁜 호흡을 몰아 쉬며 피를 토하자 자비를 베풀 듯 총을 꺼내서 죽이는 장면을 본다. 그게 안락했던가 자문하게 된다. 혹시 우리는 삶을 같이하기로 한 가족에게 총구를 들이댔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파비앙(파이, 비비, 앙꼬)이 노화를 겪고 질병에 시달리고,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과정을 잘 지켜주는 것이, 그들의 고통조차 응원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배려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안락사 논의는 여전히 힘들다. 무조건 반대한다고, 혹은 찬성한다고 선을 긋기 어려운 문제다. 다만 반려동물의 안락사가 허용된다는 점을 우리가 너무 쉽게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생각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