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코로나로 연기되었던 모든 작품들이 전부 공개되면서 작년보다도 더 풍성하고 완전한 한 해였지만, 예기치 못한 몇몇 큰 사건들로 인해 큰 변화를 겪은 한 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코믹북 무비의 부진
코믹북 영화 팬들에게는 정말 실망스러운 한 해였습니다. 소니 하나, 디즈니/ 마블 셋, 워너/DC 셋 총 일곱 작품이 개봉했는데, 10억 달러를 돌파한 작품은 고사하고 손익 분기점을 넘은 작품이 단 두 작품에 불과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 총 수익 8억 4600만달러,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6억 9100만달러
유일하게 팬들에게 위로가 됐던 것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트릴로지의 아름다운 마무리와 역대 최고의 스파이더맨 작품 반열에 오른 소니의 스파이더버스 속편이 있습니다. 분명한건 일반 관객들은 더 이상 흔해 빠지고 애매한 퀄리티의 양산형 코믹북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영화계를 뒤흔들었던 마블 영화들의 약세는 올해도 이어졌으며, 2013년부터 시작된 DCEU는 초라하다못해 처참한 마무리를 하며 체면을 잔뜩 구겼습니다. 망조가 가득했던 <더 마블즈>와 <아쿠아맨: 로스트 킹덤>은 약 2억 달러, <샤잠: 신들의 분노>와 <블루 비틀>은 1.3억달러를 웃돌며 극심한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국내에서도 5백만 관객을 넘긴 작품이 전무했을 정도로 코믹북 영화는 더 이상 안전지대라고 칭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총파업의 여파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2024년은 재정비의 시간을 갖고 잠시 쉬어가는 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즈니/마블은 퀄리티 컨트롤 차원에서 기존의 네 작품 중 세 작품을 연기시키며 <데드풀 3>만 남겨두었고, 워너/DC 역시 제임스 건의 지휘하에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으며 메인 세계관에 포함되지 않는 <조커: 폴리 아 듀>만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2. 바벤하이머, 그리고 블록버스터의 몰락
올해 극장가는 바벤하이머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작품이 전체 티켓 판매량의 30프로를 차지했다고 알려졌으며 두 작품의 격돌은 박스오피스를 떠나 시상식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놀란 감독과 워너 브라더스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유니버설과 손을 잡고, 첫 협업작인 <오펜하이머>를 견제하기 위해 워너는 <바비>를 같은 날에 개봉하는 초강수를 둡니다.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색감과 병맛 가득한 바비월드는 오펜하이머의 어둡고 진중한 분위기와 완벽하게 상충되어 여러 재치 있는 밈(Meme) 또는 짤들이 생성되었고, 이 바이럴 마케팅은 두 작품 모두에게 윈윈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민감한 주제를 다뤘음에도 <바비>는 올해 박스오피스 1위에 안착, 그리고 워너 브라더스 역사상 최고 수익을 올렸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세시간 짜리 R등급(19금) 전기 영화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9억 5200만불이라는 <조커> 다음으로 가장 높은 수익을 기록한 R등급 영화로 등극했습니다.
출처: THR(더 할리우드 리포터)
올해는 코믹북 영화 뿐만 아니라 제작비가 2~3억달러에 달하는 대형 텐트폴 영화들 또는 전통 있는 대형 IP 영화들이 평가에 관계 없이 극심한 흥행 부진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여름 블록버스터 선두주자들이었던 <더 플래쉬>,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인디아나 존스 5와 미션 임파서블 7까지 줄줄이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며 큰 충격을 안겨주었죠.
이는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대형 IP들의 속편, 리부트 또는 스핀오프는 더이상 흥행 불패 공식이 아니며 보다 신선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A24의 작품들을 비롯한 여러 저예산 독립 영화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와 극장 개봉을 적절히 활용하여 보다 폭 넓은 관객들에게 어필에 성공, 아트하우스 시네마의 전성기를 이뤘습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푸어 띵스>, 그리고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 등 예상 외의 좋은 성적으로 다양한 관객의 니즈를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스트리밍 서비스(OTT)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관객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음은 물론 기존에 봐왔던 뻔한 캐릭터와 뻔한 연출을 보기 위해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할리우드 배우 / 작가 조합 총파업
할리우드 산업 내에서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미국 작가 조합 WGA는 영화/TV 제작자 조합 AMPTP과의 계약 협상이 결렬되면서 5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약 150여일동안 파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60년대 이후 가장 길었던 파업이며, 기본적 요구 사항은 스트리밍 시대에 걸맞는 인격적인 대우와 임금 인상, 그리고 AI 활용의 제한이었습니다.
작가 조합 뿐만 아니라 배우 조합 SAG-AFTRA까지 7월에서 11월까지 약 120여일동안 비슷한 내용으로 파업을 진행했습니다. 조합 회원들은 파업 기간동안 그 어떤 제작, 홍보 활동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할리우드 산업은 몇 달 동안 완전히 셧다운 되었습니다.
피켓 운동에 동참한 마크 러팔로와 페드로 파스칼
코로나 이후 이제야 간신히 회복한 영화계에 또 한번 닥친 큰 위기였으며, 실제로 이 파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제작사 측도 상당한 손실을 겪었습니다. 양측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급변하는 사업 구조와 그 틈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는 움직임을 막고 보다 나은 근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불가피한 총파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져물고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대가 찾아오면서 작품 트렌드나 관객 취향 뿐만 아니라 제작 환경과 과정, 수익 구조 등 전반적인 산업 구조가 완전히 뒤바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4. 아시안 시네마의 꾸준한 선전
올해 초 주요 시상식들에서 돌풍을 일으킨 <에브리띵 에브리원 올 앳 원스>를 필두로 아시안 시네마, 또는 아시안 레프리젠테이션의 확장은 큰 열광을 받고 있습니다.
오스카 7관왕, SAG 4관왕 등 총 265개의 트로피를 쓸어담은 에.애.올.앳.원(EEAAO)
A24 제작한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와 이성진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가 큰 인기몰이를 하며 각종 대형 시상식 후보로도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열린 81회 골든 글로브에서 <성난 사람들>의 남녀 주연 스티븐 연과 앨리 웡, 그리고 이성진 감독까지 세 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며 <석세션> 다음으로 최다 수상을 한 TV 시리즈가 되었습니다(FX <더 베어>와 동률).
또한 <고질라: 마이너스 원>이 일본 실사 영화 사상 북미 최고 수익을 기록, 미야자키 하야오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일본 아니메 사상 북미 최고 수익을 기록하면서 일본 시네마 역시 큰 업적을 이룬 한 해였습니다.
5. 조나단 메이저스의 몰락
<더 하더 데이 폴>, <디보션>, <크리드 3>와 더불어 마블의 다음 메인 빌런 "정복자 캉"으로 캐스팅 되어 할리웃 최고의 라이징 스타 반열에 오른 조나단 메이저스가 지난 3월 전 여자친구를 폭행한 혐의를 받아 각종 논란에 휘말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12월 19일 법정에서 실형 1년을 선고받으며 사실상 업계에서 퇴출당하는 데에 이르렀고, 마블 역시 빠르게 그를 해고시키며 그의 화려할 뻔했던 커리어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향후 MCU의 향방 역시 더욱 오리무중이 되었는데, 현재로썬 여러가지 옵션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초 <앤트맨: 퀀텀매니아>의 각본가 제프 러브네스가 다음 어벤져스 작품인 <어벤져스: 캉 다이너스티>의 각본가로 내정되었으나 앤트맨의 흥행 실패로 해고되었고, 캉 배우마저 해고당한 상황에서 굳이 캉을 그대로 다음 메인 빌런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냐는 의견이 현재로썬 지배적입니다.
새로운 캉으로 배우 콜먼 도밍고가 논의중이다, 다음 메인 빌런으로 캉이 아닌 닥터 둠이 유력하며 어벤져스 5의 부제는 더이상 "캉 다이너스티"가 아니다 등 등 수많은 루머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현재. 마블 스튜디오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옵션을 검토하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마블은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지 팬으로써도 상당히 궁금한 대목입니다.
6. 마무리
코로나 이후 정상 궤도에 들어선 첫 해인 2022년과 비교해 북미와 국제 영화 시장이 훨씬 더 활기를 띤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총파업의 여파로 2024년 개봉작들의 무게감이 살짝 떨어지는 편인데, 과연 이에 따라 극장을 찾는 발걸음도 줄게 될지, 아니면 바비나 슈퍼 마리오처럼 의외의 10억불 흥행작이 혜성처럼 등장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