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란 감독의 연출적 역량의 정점
1. 첫 인상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놀란 영화중에서 가장 기교가 적습니다. 약 40년을 아우르는 시대극이자 전기 영화라는 특성 탓에 타임 점프가 잦긴 하나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데에 지장이 갈 정도는 전혀 아니고, 각 컷들이 물 흐르듯 교묘하게 잘 짜여진 인상을 받았습니다. 액션보단 대사와 드라마 위주로 세시간 내내 극이 진행되는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유머가 빠진 애런 소킨이나 아담 맥케이의 각본을 보는 듯 대사량이 많고 컷 전환이 빠르며 철저히 인물 중심의 서사로 쉴 틈 없이 몰아붙입니다.
2. 캐스트, 캐스트, 캐스트
그래서 더더욱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했고, 정말 은혜롭게도 캐스트 멤버 단 한명도 빠짐없이 완벽한 연기를 선사합니다. 한 명 한 명 클로즈업 샷이 잡힐 때 마다 극을 휘어 잡고 흔듭니다. 특별히 감정적인 연기가 아니더라도 존재만으로 극의 무게감이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배우들의 역량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놀란이 배우들에게 가진 존경심과 실존 인물들에 대한 예우가 돋보이는 완벽한 마스터플랜을 짰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보통 캐스팅이 화려하면 몇몇 배우들이 묻히거나 일종의 재능낭비 같은 느낌이 드는 역할이 있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는 그런게 전혀 없습니다. 많은 캐릭터들로 인해 산만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단 한명의 배우도, 단 한명의 인물도 낭비되지 않고 각자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케이시 애플렉, 라미 말렉, 베니 사프디, 제이슨 클락, 알든 애런라이크, 그리고 데인 드한은 짧은 분량에도 내뿜는 무게감이 상당합니다. 로다주와 에밀리 블런트는 아마 모든 주요 시상식 조연상을 휩쓸을 것이 확정적이라 굳이 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토록 독립적이고 임팩트 강한 캐릭터들 속에서도 결국 서사의 중심엔 오펜하이머가 서 있다는 점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킬리언 머피의 탁월한 연기력도 주요했지만 놀란의 각본과 연출력이 없었다면 그 긴 분량 속에서 자칫 주도권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킬리언 역시 내년에 트로피를 쓸어 담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 트리니티 테스트, 그리고 그 이후
모두가 기대하시는 트리니티 테스트 장면은 기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요동치는 화염이 가득한 스크린을 보며 단 한명의 관객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아이맥스관 전체에 적막이 흐르는데,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극장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고로 180분 내내 화장실을 간 관객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몰입도가 굉장했습니다.
극의 2막에 벌어지는 트리니티 테스트 이후 3막은 치열한 청문회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어 퓨 굿 맨>을 연상케하는 쫀쫀한 진실 공방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3막은 1막과 2막에 잘 집중한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보상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습니다.
4. 개인적 감상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시작했지만 자신의 업적이 결국 더 큰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좌절감, 자신이 만든 발명품이지만 그 어떤 통제력도 가지지 못하며 정치인들에게 놀아나는데서 오는 허탈감, 그리고 우직하게 신념을 지키고 진실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세상에게 인정받게 된다는 희망 등 놀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이해하기 버거운 플롯 포인트나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딱히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모든 작품이 그렇듯 사전에 과학 상식을 갖춰야 한다거나 영화에서 다뤄지는 복잡한 양자 역학 이론을 이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과학은 거들뿐, 역시 핵심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겪는 개인적 고뇌와 주변 인물들과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해관계에 있습니다.
5. 마무리
놀란 영화중에서 가장 액션씬이 적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셉션>과 <테넷>은 각본의 기교, <메멘토>와 <덩케르크>는 편집의 기교, <다크나이트> 3부작은 액션의 기교(혹은 스터디)를 볼 수 있었다면 이번 작품만큼은 진득하고 묵직한 캐릭터 스터디가 돋보이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담백하고 직설적인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혹여나 이전 작품들의 복잡한 플롯으로 겁을 먹은 분들이 계시다면 안심하시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적 역량의 정점을 보여주는 올해 최고의 작품 <오펜하이머>입니다.
<사진 출처: Wallpaper Aby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