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0. 오해하지 마시고 무조건 극장에서 보세요
제대로된 리뷰에 시작하기 앞서 가장 먼저 강조드리고 싶은건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칩니다. 아쉬운 점은 많지만 그렇다고 작은 화면에서 보면 더더욱 이도저도 아닌 경험이 될 것이니, 극장 경험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되도록이면 IMAX, 4DX, 돌비, 수퍼플렉스, 광음 시네마같은 특별관에서 말이죠. 특히 IMAX는 1.90:1 화면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된다는 점이 아주 큰 메리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F1 더 무비>는 현재 할리우드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이고 안정적인 공산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셉 코진스키는 앞으로도 꾸준히 대작들을 맡게 될 것이며 숀 레비와 함께 할리우드가 가진 가장 안전하고 만만한 자산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올해 가장 기대한 작품이지만 아쉽게도 올해의 영화로 등극하진 못할 듯 한데, 지금부터 그 이유들을 지금부터 하나씩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탑건: 매버릭>의 하위호환
우선 좀 시원하게 까고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포드 V 페라리> 만큼의 깊이에도, <탑건: 매버릭>의 리듬감과 모멘텀에도 한참 못 미칩니다. <탑건: 매버릭>과 거의 80프로 흡사한 전개와 컨셉을 끌고 가지만 과장은 배가되고 각본은 부실해진 것은 물론 리듬감까지 살리지 못했습니다. 중반까진 짱짱하게 잘 끌고 가지만 중후반 라스베가스 시퀀스에서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지고, 진부한 결말로 이어지며 용두사미의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인물들 간의 케미스트리가 약합니다. 소니와 조슈아, 소니와 케이트, 심지어는 소니와 루벤까지도 매우 평이하다 못해 허술한 편입니다. 영화의 주된 스토리인 조슈아가 소니를 본받아 성장하는 과정 역시 매끄럽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2. 이해할 수 없는 소니 헤이즈
이는 영화의 전체적인 각본의 문제도 있지만 소니 헤이즈의 설정이 상당히 기이합니다.
쏘니 헤이즈에게 매버릭이나 켄 마일스만큼 이입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의 무책임한 삶의 태도에 있습니다. 매버릭에겐 지켜야할 조국과 죽은 절친의 아들 루스터가 있었고, 켄에겐 아내와 아들이 있었듯 그들이 지켜야할 대상이 있었기에 그들의 생사여부는 관객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반면 소니는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조슈아와도 기껏해야 한 시즌 같이 뛴 팀메이트이고 케이트와도 사실상 단순 불장난 상대이죠. 그가 트랙 위에서 목숨을 내놓는 이유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비루하고 공허한 본인의 삶에 있어서 자신에게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엄청난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때문입니다. 소니는 "달리기 위해 달린다"라는 주의이고 그가 APXGP에 합류한 명확한 명분도 없습니다.
그의 무리한 전략들도 의문스럽습니다. 머신의 한계 때문에 직선 주로에서는 이길 수가 없고, 코너를 돌때 전투적으로 휠투휠 승부를 하며 기록을 앞당긴다는 것까진 알겠습니다. 근데 고의로 상대 선수와 접촉 후 데브리를 만들어 세이프티카 상황을 몇번이고 만들어낸다는건, 팀의 재정을 거덜내는 것은 물론 상대 선수의 생명까지 건 비신사적인 편법입니다.
종합하자면 F1 씬을 수십년동안 떠나 있던 외로운 늑대 한마리가 시즌 중반 팀에 합류해 팀원들과 계속 갈등을 빚으며 무리한 전략을 밀어붙이고, 수석 엔지니어와 사내 연애나 하고 동료 드라이버와 몸싸움까지 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모자라 트랙 위의 다른 선수들의 생명까지 위협하던 캐릭터가 갑자기 팀을 하나로 만든다라는 설정 자체가 저에겐 많이 어색하게 다가옵니다.
3. 계속되는 모순
게다가 F1이 팀 스포츠인걸 강조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소니 헤이즈의 원맨쇼가 두드러지며 이는 영화가 표방하는 것과 보여주는 것들이 모순적으로 보입니다. 진정 소니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다면 본인이 아닌 팀의 미래인 조슈아를 우승시키고 본인은 뒷선으로 물러나는 연출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요?
이토록 영화 전체적으로 레이어가 쌓이는 느낌이 전혀 없고 작은 요소들이 붕 떠서 휘날리는 느낌이 강합니다. 아무리 여름 블록버스터이고 각본보다 극장에서의 경험이 더 중요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주인공에게 이입하기가 힘들다는건 작품의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단순히 현실성과 개연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다른 스포츠 영화들, 다른 레이싱 영화들과 비교하면 인물들의 서사와 팀이 변모하는 과정의 묘사가 빈약하고 모순적이며 부자연스럽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스 시퀀스들의 연출과 편집은 거의 완벽에 가깝습니다. 이보다 더 리얼할순 없다라고 느껴질만큼 관객이 마치 콕핏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유머들도 아주 잘 먹힙니다. 제가 관람했던 용산 IMAX 관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았는데, 최소 두 세번은 빵 터졌던 것 같습니다. F1 찐팬들이라면 더 자잘하게 웃긴 포인트들도 많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캐스트 앙상블이 매우 신선합니다. 댐슨 이드리스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 받는 흑인 남성 배우이지만 제대로된 블록 버스터 출연은 처음입니다. 차기 블랙 팬서가 될 자질이 충분한 좋은 배우입니다.
또한 흔한 스타 여배우가 아닌 연기력이 검증되고 매력 넘치는 케리 콘돈을 여자주인공으로 내세운 점도 성공적입니다. 트랙 위에선 그 누구보다 똑부러지는데 또 사랑 앞에선 소녀처럼 말랑해지는 모습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역시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보았듯 강인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담아내는 좋은 배우인 것 같습니다. 매력적인 아이리쉬 액센트는 덤이고요.
또한 넷플릭스 다큐 이후에 또 한번 전세계적 F1 붐을 일으키기에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협회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선수들은 물론 감독들까지 상당 수 출연했고, 전문 용어들도 많이 나오면서 기존 F1 팬들에겐 선물이 될테고, F1을 잘 모르던 사람들에겐 좋은 입덕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5. 신나게 까놓고 이제와서?
네, 맞습니다. 제가 기대가 워낙 컸어서 그렇습니다. 기준이 무려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빛나는 <탑건: 매버릭>에 맞춰져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존 F1 찐팬들마저 영화는 영화로 봐야한다며 넘어가는 분위기인데, 단순히 이 영화가 현실과 동떨어져서 몰입하기 힘들다는게 아닙니다.
저는 <탑건: 매버릭>을 현실적인 영화라서 좋아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매버릭이라는 캐릭터 그 자체와 매버릭과 루스터, 매버릭과 페니, 그리고 매버릭과 아이스맨까지 인물들간의 끈끈한 케미스트리, 단 1초도 낭비하지 않는 완벽한 리듬의 편집 때문에 저에게 21세기 최고의 액션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F1 더 무비>는 단순히 현실성과 별개로 소니 헤이즈라는 캐릭터의 기묘한 설정들과, 캐릭터들 간의 빈약한 케미스트리가 탓에 몰입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기 힘듭니다.
개인적으로 <오블리비언>과 <트론: 새로운 시작>까지 코진스키 감독을 너무 좋아했던지라 이번 영화가 그의 역작이 될 것이라 확신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의 가장 안일한 각본이었음에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캐릭터중 가장 모순적이고 엉성한 캐릭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몇 대사에서 약간 발연기처럼 보이는 오글거림까지 느껴졌을 정도로 소니 헤이즈라는 캐릭터는 잘 못 쓰여진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처음에 말씀드렸듯 여름 액션 블록버스터로써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레이스 시퀀스 만큼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굉장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능한 가장 크고 사운드가 빵빵한 극장에서 관람하셔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관람 여부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드리면서 이만 리뷰 마치겠습니다. 곰 크루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