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완벽하고 완연한 새 출발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 마블의 아주 오랜만의 수작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느꼈는지 하나씩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캐릭터와 캐스팅
네 배우 개개인의 연기는 물론 이들이 이루는 앙상블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네 캐릭터 모두 결이 하나하나 살아 숨쉬며,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며 완벽한 네 개의 기둥 역할을 합니다. 누구 하나 묻히거나 비중이 한 쪽으로 기우는 느낌은 전혀 없고, 네 명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밸런스가 완벽합니다.
페드로 파스칼의 역할들이 대부분 거칠고, 선악을 넘나드는 야성미 넘치는 캐릭터들이라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때 매치가 안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생각했지만 배우 개인의 역량을 믿어보기로 했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그야말로 대체 불가의 캐스팅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의 대사 전달 방식과 제스쳐 하나 하나가 그가 연기 했던 그 어떤 캐릭터들과도 다르고, 리드 리처드라는 캐릭터에 완벽하게 부합합니다. 이전의 이안 그러퍼드, 마일즈 텔러, 존 크라진스키가 미스캐스팅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단순히 코믹스의 리드 리처드와 싱크로율이 높아서가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페드로 파스칼만의 탁월한 해석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배우 자체가 현재 할리우드 내에서 가진 지위와 배우로써의 역량이 이를 가능케 하는 듯 합니다. 로다주가 '인피니티 사가'에서 그랬듯 이제는 페드로가 출연진 사이에서의 기둥 역할을 해줄 것이고요, 리드 리처도가 토니 스타크의 지적 능력을 대신할 것이며, 미스터 판타스틱이 아이언맨을 잇는 어벤져스의 확실한 리더로 거듭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수 스톰' 역시 바네사 커비만의 목소리 톤과 피지컬리티, 깊은 감정 연기를 통해 완벽히 재탄생됩니다. 모성의 숭고함과 경외심을 완벽하게 캐릭터 속에 담아 내고, 수 스톰의 리더쉽과 인비저블 우먼으로써의 강력한 능력까지 모두 강조되는데요. 리드 리처드보다 더 부드럽고 포용력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리드 리처드와 함께 MCU 내에서 기둥 역할을 하는 '파워 커플'이 될 자질이 충분합니다.
'조니 스톰' 역시 조셉 퀸의 인터뷰대로 이전 휴먼 토치들과 많이 다릅니다. 단순히 여미새 관종 핫가이가 아닌 정말 판타스틱 4에 없어서는 안될 중추적인 인물로써 큰 역할을 합니다. 영화가 너무 무거워질때쯤 한번씩 긴장을 풀어주며 영화의 리듬을 경쾌하게 끌고 가는 것은 물론, 희생 정신까지 갖춰 심도 있는 캐릭터로 재탄생 했습니다. 가장 돋보이는건 그의 명석한 두뇌가 빛나는 활약상인데, 조셉 퀸이 가지고 있는 똘똘한 이미지에도 굉장히 잘 부합합니다.
에본 모스 바크락이 연기한 '벤 그림' 역시 완벽합니다. 특히 FX <더 베어>를 본 사람들이라면 씽을 보며 '커즌'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고를 당하기 전 벤 그림의 모습은 극히 일부지만, CGI로 구현된 씽의 얼굴과 에본의 얼굴이 영화 내내 오버랩 되어 보입니다.
이말인 즉슨 씽을 연기하지만 결국 벤 그림의 내면까지 완벽하게 담아낸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목소리 걸걸하고 덩치에 어울리는 마이클 칙킬리스 같은 배우를 또 캐스팅 할 수도 있었지만, 벤 그림 고유의 넉살, 화끈함, 부드러움과 더불어 내면의 슬픔까지 전부 한번에 담아내는 정말 완벽한 캐스팅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네 캐릭터 모두가 하나의 기둥으로써 영화를 완벽하게 받쳐주면서, 서로 간의 케미도 확실하게 살립니다. 리드와 수, 수와 벤, 리드와 벤, 벤과 조니 각각의 케미스트리 모두 영화 곳곳에 녹아 들어 있습니다.
이런 케미는 사실 아무나 구현하기 힘듭니다. 캐스팅 뿐만 아니라 각본의 퀄리티와 짜임새, 편집 등 여러 요소들까지 받쳐 줘야 가능할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섀크먼의 능력이 제 기대를 월등히 뛰어 넘는 듯 하며 그의 역량이 어디까지일지 참 궁금합니다. 이런 앙상블을 구현할 수 있다면 충분히 먼 훗날 새로운 어벤져스 영화를 맡을 자질도 충분하다고 보여집니다.
2. 비주얼
비주얼은 역대 MCU 중 손에 꼽습니다. 이건 비단 VFX 뿐만이 아니라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포함하는 얘기인데요, 한 마디로 디지털적인 부분과 실재적인 부분까지 굉장한 수준의 비주얼 포트폴리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스텔라를 연상케 한다는 일부 평이 과장인줄 알았으나 과장이 아니었음에 크게 놀랐습니다. 초반부 블랙홀 추격 시퀀스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을 주고, 실버 서퍼의 아름다운 무빙까지 그야말로 눈이 호강합니다.
갤럭투스는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작품들 보다도 실사화가 잘됐고, 스케일감을 아주 잘 살린 듯 합니다. 간혹 가다가 갤럭투스가 너무 작다고 불평하는 소리도 들리던데, 사실 영화를 위해 가장 적합한 스케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 코스튬과 VFX를 아주 적절하게 활용해 갤럭투스의 위용이 스크린 밖으로 뚫고 나오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단연 돋보이는 것은 프로덕션 디자인입니다. <로키> 시리즈와 동일한 미술감독인 만큼 TVA와 비슷한 느낌이 있는데, 이 영화의 레트로퓨처리즘 컨셉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최근 '더 볼륨'에 과하게 집착하는 추세를 거스르고 세밀하게 창조해낸 실제 세트에서 촬영된 장면들은 영화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3. 테마와 의미
사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한 편이지만, 이를 전개하는 과정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갤럭투스를 제외한 이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이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바로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갤럭투스는 신의 뜻으로 해석해 가족을 응집시키고 결집시키기 위한 세상의 순리라고 상정한다면 사실상 이 영화엔 빌런이 없습니다. 판타스틱 4도, 시민들도, 실버서퍼도, 몰 맨도 전부 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죄 밖에는 없습니다.
수 스톰이 프랭클린을 안고 한 연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가족을 가진다는 것은 나보다 더 거대한 것들과 연결되는 것이며 나보다 더 거대한 존재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는 말이 정말 크게 와닿습니다.
내가 단순히 정의감이 투철해서, 엄청난 힘을 가져서가 아니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내 한계를 뛰어 넘는 굉장한 힘이 발현될 수 있고, 그 힘들이 한데로 모인다면 그 어떤 불가능한 일들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가족의 연대와 결집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여도 지금 같은 분열의 세대 속에서 가장 필요한 메세지이며, 서로의 이견을 뒤로 하고 공통의 목표를 향해 같이 노력하는 태도가 그 어느때 보다도 중요한 시대이기에 영화가 주는 울림은 남다릅니다.
4. MCU라는 세계관의 관점에서
단순한 플롯과 더불어 미래를 위한 세팅에 과하게 집중하지 않았다는 점도 큰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내년 <어벤져스: 둠스데이>의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지 않고, 그저 무엇이 가장 '판타스틱 4' 다운영화일지를 고민해서 만든 결과물이라는게 느껴질 정도로 본질에 충실한 마블 영화입니다.
거시적 관점으로 봤을때 '파워 코스믹'을 가진 프랭클린 리처드의 탄생 이외에는 해석할 것들이 그닥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품 자체로써 할 이야기가 많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완벽하게 독립성을 띄는,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내실이 꽉 찬 좋은 영화 한 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 지구-828이라는 배경 덕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구-616과 달리 우리가 아는 이 세계 속 히어로는 판타스틱 4가 유일하기 때문에 보다 독립적이고 기존 설정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운 스토리 텔링이 가능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5. 마무리하며
이번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은 60년대라는 '과거'의 시대적 패브릭에 '미래'적인 과학 기술을 접목해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메세지를 던진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숭고하고 고결한 업적입니다. 마블 영화를 보면서 간만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어벤져스>(2012)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흡사한 느낌을 줍니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이 작품 하나만를 위해 존재하는, 굉장히 잘 만들어진 공예품 같습니다. 최근 마블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공산품스러운 느낌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이건 오로지 맷 샤크먼의 비전으로 빚어낸 결과물이며, 마블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작품입니다.
<썬더볼츠*>가 작품의 퀄리티는 좋지만 약간의 페이싱 이슈가 있었다면, 그걸 의식이라도 한 듯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쉴새 없이 마구 휘몰아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 캐릭터의 내면, 캐릭터 간의 케미스트리, 60년대 시대상, 확실한 테마와 메세지, 비주얼적인 카타르시스, 유머까지 전부 빠짐 없이 챙기며 작은 톱니바퀴들이 완벽히 맞물려 착착 굴러갑니다.
흥행 여부와 별개로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것 만으로도 마블에겐 큰 업적이자 흐름을 뒤바꿀 크나큰 전환점으로 작용할 것이라 확신 합니다. 엔드게임 이후로 "마블이 돌아왔다!"라는 말을 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웠으나, 이번 작품을 계기로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