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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무샤(影武者)

by 이기적 해석가

그림자에서 벗어나 실체가 되고 싶었던 영무자. 그러나 닿을 수 없었던 태산(太山)

카​게무샤는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으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입니다. 16세기 센고쿠 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다케다 신겐의 말년을, 카게무샤라는 설정을 추가하여 다뤘습니다. 영화는 혼란스러웠던 당시 일본의 상황을 잘 반영합니다. 다이묘들의 권력 투쟁과 계략을 전투의 형태로 보여주면서 다케다 가문 내부의 문제까지도 다뤘습니다. <그랑프리(1966)> 이후 오랜만에 DVD로 감상한 영화라 노이즈 낀 화질이 반갑더군요. 깨끗한 화질만 보다 보니 아날로그 영상이 방해가 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노이즈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화려한 색채, 영상미를 배가시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카게무샤>는 넷플릭스, 왓챠를 비롯한 OTT 서비스에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Yes24 중고 매장을 통해 DVD를 구매하여 감상하였습니다.

"실체가 있고서야 그림자도 있는 법" 신겐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도가 카게무샤 (신겐의 영무자인 좀도둑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겠습니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실체와 그림자를, 신겐과 카게무샤를 대비합니다. 영화의 롱테이크 오프닝 시퀀스에는 신겐과 노부카도, 카게무샤가 거리를 두고 앉아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사형장에서 형 집행을 기다리던 좀도둑은 노부카도의 눈에 띄어 신겐 앞에 섭니다. 카게무샤는 신겐에게 "난 고작해야 푼돈 몇 푼이나 훔친 도둑이지.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수백만을 죽게 만든 큰 도둑놈한테 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이유가 없어!"라고 외칩니다. 해당 대사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집니다. 첫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지속적으로 던지는 영화의 주제를 함축합니다. 둘째, 카게무샤의 변화를 암시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신겐은 좀도둑의 배짱에 마음이 들었고, 그를 카게무샤로 내정합니다. 해당 장면에서 그림자를 가진 존재는 다케다 신겐뿐입니다.(아래 이미지 참조) 노부카도와 좀도둑 모두 그림자 그 자체(카게무샤) 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또한, 신겐의 그림자는 좀도둑 방향에서 비친 광원에 의한 것입니다. 실체를 비추는 빛이 카게무샤의 방향에 있다는 것은, 카게무샤가 점차 신겐의 정체성을 얻어 갈 것을, 그 속에서 혼란을 느끼게 됨을 암시합니다.


다케다 신겐과 카게무샤. 그림자를 가진 존재는 신겐뿐이다.


<카게무샤>의 핵심은 신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카게무샤가 각성의 과정을 통해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신겐의 정체성이 자라며 겪는 혼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겐이 살아있음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지만, 자신과는 다른 성향을 가진 산과 같은 신겐을 따라잡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카게무샤는 자신의 본질을 철저히 부숴야 했습니다. 이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존재는 카게무샤로서의 경험이 있는 다케다 노부카도였지만, 그 또한 도둑놈을 주군으로 모실 수 없다며 천대합니다. 그런 외로움 속에서, 카게무샤는 생생한 꿈을 하나 꿉니다. 자신이 훔치려던 거대한 항아리 속에서 위엄 있는 다케다 신겐이 등장하고, 칼과 채찍을 들고 카게무샤를 죽일 듯 쫓아옵니다. 카게무샤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지만, 어느 순간 신겐은 추적을 멈추고 돌아서자 이번엔 카게무샤가 그의 뒤를 쫓습니다. 해당 장면은 신겐이 되고 싶지만, 동시에 그가 두려운 카게무샤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흔들리는 정체성을 제시한 장면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저무는 태양은 다케다 가문의 몰락을 제시하면서 카게무샤의 각성을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신겐의 생사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의 전투는 저녁부터 밤에 이루어집니다. 신하들은 카게무샤가 가짜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킵니다. 카게무샤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 밤에 신겐이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카게무샤는 낙마하여 가짜임이 드러나고 쫓겨납니다. 대낮에 이루어진 최후의 전투에서 카게무샤는 자유를 얻지만, 전멸당한 다케다 군대를 가로질러 이에스와 오다의 연합군의 총격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신겐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한 카게무샤를 보여줍니다.

<카게무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 또한 카게무샤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신겐의 시신은 호수에 버려졌고, 그곳에서 카게무샤는 신겐의 그림자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꿈속에서도 물이 등장하며, 마지막 전투에서 카게무샤는 신겐의 깃발을 향해 호수 위로 떠내려가며 최후를 맞이하죠. 물은 카게무샤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세신(洗身)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모습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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