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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와 조커

by 이기적 해석가

<조커>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남다른 작품입니다. 처음으로 블로그를 쓰기로 마음먹은 영화이기 때문이죠. 영화적 지식은 턱없이 부족하고 본 영화라고는 손에 꼽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름대로의 논리에 심취한 채 호기롭게 써 내려가던 블로그가 <조커: 폴리 아 되>가 개봉하는 순간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오랜만에 첫 글을 다시 꺼내보니 어디 내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참담하더군요. <조커: 폴리 아 되>가 개봉한 시점에서 <조커>를 다시 다루고 싶어 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커>와 <조커: 폴리 아 되>로 이어지는 시리즈는 아서 플렉이라는 아무도 관심 없던 밑바닥의 인물이 조커가 되어 미디어의 중심에 서고 추락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편의 작품 모두 굉장히 잘 만든 수작이며 감독의 탁월한 감각이 돋보입니다. 해외 평론가를 중심으로 한 평단의 <조커: 폴리 아 되>의 평가가 좋지 않은 지금, 이 작품은 분명히 재평가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봅니다.


"매스 미디어(Mass Media)"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 시대를 관통하는 단어이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정보를 소비하던 시대의 이야기이죠.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산업은 완전히 변화되었고 수많은 케이블과 광고, 프로그램들이 생겨났습니다. 조금이라도 시청률을 모으기 위해 자극적인 기획도 서슴지 않았죠. <조커>는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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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는 두 편의 영화를 닮았습니다. 바로 마틴 스콜세이지의 <코미디의 왕>과 시드니 루멧의 영화 <네트워크>이죠. <코미디의 왕>은 코미디 쇼 호스트를 꿈꾸는 주인공 루퍼트 펍킨이 간판스타 제리 랭포드를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룹니다. 루퍼트는 랭포드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해당 쇼의 호스트 자리를 요구합니다. 펍킨은 해당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쓰고 성공하며 "루퍼트 펍킨 쇼"를 론칭합니다. <조커>는 <코미디의 왕>에 대한 오마주가 많습니다. 아서 플렉의 행동과 망상이 루퍼트 펍킨과 닮았고, 심지어 루퍼트 펍킨 역을 맡았던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머레이 프랭클린 역할로 나오죠. <네트워크>는 점점 떨어지는 시청률로 인해 우울증과 무기력감에 사로잡히는 간판 앵커 하워드 빌의 이야기입니다. 하워드는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2주 뒤 해고 통보를 받고 방송에서 자살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워드의 방송 인생은 끝나는 듯싶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관객들은 하워드에 열광하고, 시청률에 목을 맨 기획부장은 하워드 빌 쇼를 만듭니다. 하워드는 자극적인 말들로 사람들의 분노를 끌어내며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아서가 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들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없애려는 권위적인 토마스 웨인과 그런 하층민들을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드는 머레이 프랭클린에게 분노를 표했고 사람들은 이에 반응했습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머레이 프랭클린의 죽음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이를 기점으로 고담은 혼돈에 사로잡혔습니다.


<조커>는 상류층과 하층민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토마스 웨인은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고담 시장 출마를 선언하고서 조차 하층민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면 살인마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은 병든 사람들이라거나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는 머레이 프랭클린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레이 프랭클린은 자신의 쇼에서 사회 문제를 비꼬며 농담을 던집니다. "쓰레기 파업이 진행되어서 쥐들이 완전 슈퍼 쥐(Super Rats)가 되었던데, 그 해결책을 아시나요?", "바로 슈퍼 고양이(Super Cats)입니다!"와 "좀 덜떨어진 아들에게 쓰레기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니까 아들이 뭐라는 줄 아세요?" "그러면 쓰레기를 어디서 구하죠?" 등이 대표적입니다. 쓰레기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은연중에 비꼬아서 조롱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무지를 웃음의 대상으로 삼았죠.


아서는 그런 머레이에게 현실이 어떤지 아냐고 묻습니다. 머레이는 소파에 앉아 사람들을 조롱하고 돈을 받습니다. 머레이의 현실은 아서의 현실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상류층의 현실은 조용하고 깨끗한 브루스 웨인의 집과 거대한 홀에 모여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감상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소음 하나도 없고 잔잔한 클래식만 흐르는 홀 내부와는 달리 바깥에서는 고담의 시민들이 모여 광대 분장을 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상류층의 현실은 하층민과 달리 평화롭고 조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죠. 아서가 머레이를 죽이는 장면이 송출된 이후 나타난 화면 조정 화면 속 인디언 그림은 소외된 하층민을 상징합니다.


웃음은 <조커>에서 핵심 되는 소재입니다. 아서는 3명의 남성에게 괴롭힘 당하는 여성을 바라보고 웃음이 터집니다. 혹은 버스에서 아이를 건드리지 말라며 무안을 당한 상황에서 웃음이 터지죠. 앞서 이야기했지만 머레이 프랭클린은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들며, 상류층은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노동자의 우스꽝스러운 연기(모던 타임스)를 보며 웃음 짓습니다. 또한, 게리가 랜들로부터 조롱당할 때, 아서는 가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웃음은 한 사람이 조롱당하거나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었을 때, 다시 말하자면 상대방이 고통받을 때 터져 나옵니다. 아서의 꿈이 힘든 사회 속에서 사람들에게 순수한 웃음을 주고 싶다는 것과는 반대되는 점에서 아이러니하죠.


정리하자면, <조커>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상류층의 조롱의 대상에 불과하던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이 현실의 괴로움에 못 이겨 우발적으로 벌인 범행에 사람들이 동조하고, 방송에 출연해 벌인 살인이 시민의 분노와 광기를 촉발하여 조커로서 인정받아 정상에 위치하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서가 정치, 사회적인 의미를 두고 벌인 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서는 그저 개인적인 원한과 분노로 저지른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노에 찬 시민들은 매스 미디어에 등장한 아서의 모습만을 보고 상류층을 향한 분노라고 해석하고 동조하였죠. <조커: 폴리 아 되>에서의 아서는 그런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게 벅차 보입니다.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조커의 인터뷰와 재판에서는 아서 플렉은 불안해하고, 이내 조커를 부정합니다. 자신의 우상이 몰락하는 장면을 본 지지자들은 야유했고, 결국 아서는 조커를 내려놓죠.


어쩌면 토드 필립스 감독은 평론가와 관객의 낮은 평점을 의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커>를 감상한 관객들은 영화 속 조커 추종자들처럼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이 아닌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조커에 열광했기 때문입니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전작인 <조커>를 아서 플렉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구분 짓는 이유는, 매스 미디어가 가지는 힘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고담 시민들이 아서의 모습을 오도하고 폭동을 일으켰 듯, 현실에서도 <조커>를 본 관객들이 그저 상류층을 향한 분노를 표현하는 영화 정도로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죠. 그래서 <조커: 폴리 아 되>는 몰입 방해와 단절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조커라는 가면 속에서 살려달라 울부짖는 아서 플렉을 다시 원래 자리로 끌어 내려놓습니다. 다시, 아서는 쓰레기들이 가득한 고담 거리를 과장된 뜀박질로 뛰어다니고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위치의, 어쩌면 조커 시위에 참여했을지도 모를 이웃에게 흠씬 두들겨 맞거나 칼에 찔립니다. 다시금, 아서 플렉은 길바닥에 버려진 채로,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누워있으면 그저 밟고 지나가는' 한 존재로 추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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