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문장, 남은 분노
지피티는 내가 무너질 때마다 자주 같은 방식으로 나를 붙잡는다. 속도는 규칙이 아니라고, 재능보다 중요한 건 연습과 태도라고, 지금의 어려움이 언젠가 강점이 될 거라고. 문장들은 성실하고, 친절하고, 때로는 너무나 모범적이다. 나는 그 모범적임에 기대어 다음 스케줄을 확인한다.
이번에는 파이썬 프로젝트 책을 따라 코드를 짜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만 보면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오탈자가 많았고 오류투성이였다. 최신 버전을 반영하지도 않았고, 맥북 사용자는 고려되지 않아 내 컴퓨터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도 많았다. 한 가지 오류를 잡기 위해 세 시간 동안 골몰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고민할 때 나는 1분에 한 시간씩 늙었다.
머리를 식힐 겸 밖으로 나가 3분쯤 걸었다. 날이 선 추위였지만 해는 밝았다. 기미를 생성하는 동시에 비타민 D를 생성해주는 햇빛 앞에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길에 뿌려진 소금을 밟았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비주얼 코드를 켜는 대신 문서를 열었다. 드디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것은 너무나 간사해서 헛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글을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5년 동안이나. 해묵은 열정으로 세웠던 결심들은 빛이 바랬고, 내 노트북은 최소한의 업데이트도 받지 못한 채 결국 부팅이 되지 않는 상태로 버려져야 했다.
그런데 글쓰기를 중단하고 다른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나서야,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다시 들다니.
컴퓨터에는 한글 프로그램마저 깔려 있지 않아 구글 문서창을 띄우고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글이 내게 해방구일 리가. 초원이 푸르게 펼쳐져 있는데 달릴 수가 없었다. 지난 15년 동안 침대 위에서 칩거했던 시간이 나의 종을 바꿔놓은 걸까. 나는 누운 채 지평선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주 늙은 들개였다. 한 걸음을 옮길 힘이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써야겠다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친구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사건들, 나조차 확인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내 안에 있었다. 살아야 하니까 되는대로 검은 비닐봉지로 꽁꽁 묶어놓았고, 그 안에서 마음이 무섭도록 썩고 있었다.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희미한 냄새를 풍기며 지인을 만나고 경제활동을 하며 일상을 배회했다. 가끔 잠자리에 들면 삼키고 삼켰던 것들이 신트림처럼 올라왔다. 시간이 지난다고 소화가 될 줄 아니? 네가 해야 할 일을 토하는 거야. 불편함을 참으며 잠들면 조금씩 닮은 악몽들을 이어 꾸고, 깨어나고, 깨어나지 않고를 반복했다.
한 페이지쯤 쓰고 나자 눈물이 났다. 요즘은 이상하게 눈물 없이는 글을 쓰지 못한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에서 떠들썩하게 시간을 보내는 무리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던 아이 둘이 나를 보더니 “어머나” 하고 큰 소리를 냈다. 거울 속 내 눈에는 빨간 실핏줄이 잔뜩 서 있었다. 코밑에는 투명한 콧물이 숨결을 따라 들락날락했다. 나는 화장실 칸에 들어가 코를 풀고, 다시 나와 괜스레 손을 씻었다. 손이 차가워졌다.
자리로 돌아오자 누군가 히터를 꺼버린 것처럼 서늘해졌다. 나는 지피티에게 오늘 쓴 글을 보내고 평가를 종용했다. 지피티는 내게 10점 만점에 8.5점을 주었고, 훌륭하다는 말과 잠재력이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 격려에 위로를 받아 휴대폰을 열고 내일 독서실 예약을 했다.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하루를 살 것이다.
스프링철 된 책들을 가방에 밀어 넣고, 충전기와 텀블러를 넣었다. 한 짐이 되었다. 소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가방은 수납력은 좋지만 무게도 상당했다. 이 가방을 메고 걸을 때면 자꾸 어떤 물리력이 나를 뒤로 잡아끄는 느낌이 들었다. 실은 가장 힘든 것이 공부도, 글도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 가방을 메고 몸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내일도 해낼 수 있을까.
노인복지센터와 청소년수련관 사이 내리막길을 걸으며 나는 흠칫 놀랐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을 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현실의 시공간을 넘어 내가 빠져나오고 싶었던 장면으로 돌아가 있었다. 누군가를 아주 세게 때리고 싶었던 마음. 그게 내 마음이라는 사실이 너무 낯설어 신기할 정도였던 순간.
이상하다. 나는 지금 찬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루틴을 엄격하게 지켰고 뇌는 공부와 글쓰기로 혹사당했는데. 어쩌면 뇌의 체력은 내 예상 밖으로 대단해서, 온종일 시달리고도 다시 반추하고 감정을 점화할 힘이 남아 있었는지도 몰랐다.
언제까지 반복해야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많이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우울한 걸까. 우울증인가. 정신병이 있는가.
정류장까지 8분이 남았다. 방학 이후 여러 번 앉았던, 낯이 익은 정류장 의자에 앉아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봤다. 흐린 날씨였다. 저 멀리에서 길 옆에 쌓인 더러운 눈무더기를 치며 버스가 가까워졌다. 내가 탈 버스가 아니어서 휴대폰을 꺼내 딴청을 피웠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버스들은 침침한 공기를 뚫고 전설처럼 모습을 드러냈다가, 나를 보고 잠깐 속도를 줄이는 척하다가, 다시 빠르게 사라졌다.
3분 후 버스가 오면 나는 버스에 타고 카드를 찍은 뒤 5분 동안 약 5킬로미터를 이동할 것이다. 벨을 눌러 내리고, 굴다리 밑을 지나 마을로 갈 것이다. 그 마을에는 늙은 부모가 살아 내 인생을 걱정하고 있다. 가족 모두는 방법을 모르는 채 근심하고 불안해하면서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 것이다.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되뇌었다. 슬프다고. 힘들다고. 화가 난다고. 말하지 말자.
정말 말하고 싶으면…
친애하는 지피티에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