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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소 May 24. 2024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엄마 등에 새우처럼 엎드린 아기가 있다.

잠시 후의 운명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른 채 곤히 잔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싶지만, 엄마한테 들은 내용이니 맞겠지.
본인의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본가 피붙이의 식구들까지 물심양면으로 돕던 아버지의 오지랖이 우리 세 식구의 생계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순하고 약한 몸으로 굶기를 거듭하던 엄마는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어린 날 버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한다.

노을이 신밧드의 양탄자처럼 펼쳐진 어느 오후 엄마는 커다란 고목 밑에 포대기를 풀어놓고 돌아선다. 그때 잠에서 막 깬 내가 엉금엉금 기어 나오며 엄. 마 하고 부르더란다. 그 소리에 엄마는 목 놓아 울었다. 어린 내가 마음에 걸린 엄마는 도망치지 못했고 가난의 블랙홀로 다시 들어갔던 것이다.

아주 어릴 때였지만 버려질 뻔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랬는지 난 혼자 있는 걸 좋아했고 그 누구도 쉽게 믿지 못했다. 지금도 갖고 있는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에서 내 표정은 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내동댕이쳐진 달팽이 모양 잔뜩 움츠린 모습이었다.
아빠 회사 사정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하는 통에 안 그래도 내성적인 나는 친구 하나 없었다. 무료한 날들, 공상과 상상 속에서 헤엄치는 일이 현실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만나는 것보다 안전해 보였다.

중학생 시절 투명 인간처럼 지내며 은근한 왕따를 당했다. 그러려니 하고 나름대로 왕따를 즐겼다. 조용한 게 좋았으니까. 그러나 고등학교 때까지 이런 패턴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사회성을 책으로 배우듯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표정과 대사를 연습했다. 겨우 미지근하고 발랄한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대학에 갔다.

대학 새내기 시절 졸업반 선배와 첫사랑을 하다 헤어지고 프랑스로 유학 준비를 하게 되었다. 유학 준비를 끝내놓고 한 달의 시간이 남아 레스토랑 알바를 하기로 했다. 그 레스토랑에서 남편을 만나고 급기야 유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일찍 낳은 두 딸이 한참 사춘기를 시작할 때 남편의 사업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럴 때 늦둥이 아들을 만난 건 삶의 끈인 동시에 축복이었다. 큰딸이 한참 사춘기를 지나느라 힘들게 할 때 어린 아기인 아들을 바라보고 가시밭길 같은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으니까.

결국 전 재산을 다 털어먹은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두 딸은 직장 근처에서 지내고 남편은 제주도로, 나와 아들은 친정으로 들어가 2년을 살았다. 매주 주말이면 양수리 친정에서 딸들의 원룸으로 가서 다섯 식구가 새우잠을 잤다.

그래도 얼마나 행복하던지!

역시 가족은 가까이에서 살을 부대끼는 맛으로 어려움을 이기는 것 같다.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지금은 감사할 일이 많다.

속 썩이던 큰딸은 부산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워킹맘으로 살고 있다. 둘째 딸은 대전 성심당에서 열정 뿜으며 일하는 파티시에다. 팀원들을 카리스마 넘치게 진두지휘하는 팀장으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큰딸이 낳은 손자와 우리 아들의 나이 차이는 여덟 살이다. 나는 졸지에 엄마와 할머니를 오가며 지내고 있다.


아직 인생의 끝자락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이 인생의 끝자락이라고 한대도 마음속에 미진하게 남는 것은 없다.

열과 성을 다해 생이라는 강을 건너와서일까.
내가 가진 달란트로 최선의 힘을 내며 살아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로 실패와 실수와 후회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러면 또 어떠랴. 그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내게 남은 삶에서 더 깊은 묘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부족하고 아쉬워도 지금처럼 감사하며 지내다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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