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키워드로 잡은 지 어언 두 달.
나는 성장이란 아이의 나사를 풀어 이리저리 뜯어보고, 냄새 맡고, 귀에 대고 흔들어보기도 하며 급기야는 혀를 대 보며 맛까지 느끼려고 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라디오도 아니고, 더군다나 텔레비전도 아니며 빵도 아니었다.
처음 성장을 글의 키워드로 잡은 이유는 '성장하게 해주고 싶은' 딸 때문이었다.
딸은 다 큰 정도가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엄마가 되었는데도 종종 징징거리며 내게 '무엇이든 물어볼게요'를 시행하고 있어서 언제 클라나 하고 답답한 차였다.
그래서 딸에게 '성장을 너에게 말해주마!'라고 결연하게 성장을 받아 들었으나...
쓰겠다고 마음먹고 성장을 샅샅이 뒤져(사실 내가 뒤질 곳이 뻔하지. 다른 책들이나 어학 사전이나 네이버 검색이 다다) 보았더니 더더더 내가 가진 성장의 정보와 경험이 너무 남루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의 유산을 읽어나가다 보니 내가 정말 쓸 수 있을까? 겁을 팝콘처럼 집어먹게 되었다. 평소처럼 많이 먹었다.
그러나 쓰겠다고, 쓸 수 있다고 방정을 떨었으니 그 방정의 값이라도 치르려면 초고 라도 내놓아야 할 판이다.
문장을 만들고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정작 성장을 수신할 사람은 딸이 아니라 나였다.
성장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내가 성장을 주겠다고 공염불을 한 격이 되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문장을 쓰면 쓸수록 나는 남의 다리를 긁고 있으니 내 가려움을 해결할 수 없었고, 산으로 가는 배를 끌어내리려 비지땀을 뚝뚝 흘리게 되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은 없지만(사실 없는 게 아니라 내가 발견할 눈이 없는 것이다) 성장을 쓰면서, 쓰는 도중에, 쓰는 중간에 나도 성장이랑 같이 성장하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랑, 딸이랑, 성장이랑 성장행 기차여행을 하는 것인가.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나는 인문학 독서를 꾸준히 하고 있으므로 시계의 초침만큼 성장하는 중이고, 성장은 글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게 될 것이며, 딸은 완성된 성장의 글을 읽고 일 센티미터만큼 성장할 것이므로 우린 반드시
(시작하기도 전에 김칫국을 마시면 자연스럽게 유산균 섭취가 되어서 성장을 쑴풍 낳게 될 것이다 - 주문이며 기도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은 내가 쓰는 첫 번째 편지, 성장을 어떻게 써나가고 어떻게 확산하고 수렴하는지 쓰고 찢고 다시 쓰는 성장을 낳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