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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우 Sep 15. 2024

추신, 구태여 한마디 보탤 때는

 편지를 쓰는 마지막 세대로 태어나 편지를 도무지 볼 수 없는 시대에 살아간다. 유년시절에는 편지가 흔해 편지의 소중함을 몰랐다. 하굣길, 신발주머니를 휘두르며 집으로 돌아오면 일 나간 엄마가 놓아둔 간식 소쿠리 위엔 언제나 짤막한 편지가 있었다. 학교에선 때마다 군인아저씨들을 위한 위문편지를 쓰게 시켰고, 예쁘장한 옆반 친구에게 애틋한 마음을 전할 때에도 거침없이 편지지를 들었더랬다.


 집집마다 놓여있던 전화기가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휴대전화로 바뀐 후부터는 편지를 받아본 기억이 드물다. 받아봐야 흘러간 인연들과 이벤트성으로 주고받던 기념일 편지와, 성인이 된 이래 처음 타의로 휴대전화를 빼앗긴 논산 훈련소로 친구들이 보내준 위문편지정도. 그밖에 평범한 일상에서 편지는 먼 나라 얘기가 됐다. 빛처럼 빠른 이메일과 문자, 그것들보다 한층 빠른 카카오톡이 이미 편지의 자리를 대체한 지 오래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상 속에서 운 좋게도 짧은 편지나마 받아 든 날엔 마음이 충만해진다. 이다지도 벅찬 마음으로 글자는 물론 행간과 문장부호의 의미마저 곱씹고 또 곱씹어본다. 그중 내 눈이 유독 오래 머무는 순간은 바로 맨 마지막 '추신' 부분에 이르렀을 때다.


 편지 마지막에 덧붙이는 추신에는 수많은 마음이 맺혀있다. 상대를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쓸까 말까 머뭇거리는 배려와, 부담이 될까 봐 10만큼 적고 싶은 애틋함을 꾹꾹 눌러 5만큼만 적어내는 사랑과... 이밖에 받아 든 이는 미처 헤아릴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마음들이 편지의 추신을 이룬다.


 그래서 나는 추신에 적힌 문장을 곱절로 읽는다. 그렇게 오해와 곡해 없이 상대방이 꾹꾹 눌러 적었을(혹은 끝내 적지 못했을)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허황된 일을 꿈꾼다. 언제나 그렇듯 상대의 마음은 상대방만이 알 텐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추신은 여운이다. 추신은 영화가 끝난 뒤 관람석에서 선뜻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을 닮았다. 향수로 치자면 강렬하고 신선한 탑노트보다 은은하게 오래 남는 베이스노트를 닮았다. 사랑으로 치자면, 함께하던 시절보다 끝난 후에야 더 많이 기억되는 사람을 닮았다.


 편지를 쓰는 일이 유난이 된 요즘, 추신은 번거로운 일에 구태여 수고를 한 꺼풀 보태는 일이다. 그래서 추신에는 유난보다 더 유난스러운 마음이 담겨있다. 편지를 받아 들 상대방과 편지를 적어내는 나의 마음을 기어이 한 번 더 떠올려보는 정성이 서려있다.


 나이가 들수록 말수를 줄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이제는 꾹 참는다. 구구절절 떠벌리는 걸 취미 삼아하던, 편지로 치자면 추신보다는 본문에 가까웠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 줄 힘도, 그러한 순간들도 늘어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말을 줄일수록 생각할 시간이 는다. 그렇게 생각이 늘수록 말을 듣는 상대방을 헤아리게 된다.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는 건, 부지런히 무해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거기에는 떠벌리고 싶은 나의 오랜 습성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더 중시하는 노력이 필요치 않나 싶다. 품이 많이 들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 유난스러운 헤아림이 가득한, 추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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