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리기 5분 전, 기계처럼 눈이 떠집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창밖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넥타이를 고쳐 매고, 현관문 앞에서 잠든 아이의 방문을 흘깃 본 뒤, 아내가 챙겨준 텀블러를 들고 집을 나서는 것. 지난 10년간 거의 매일 반복된 저의 아침 풍경입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은 낯설었습니다. 이마에 희미하게 자리 잡은 주름, 피곤함이 가시지 않은 눈. ‘김 부장’, ‘서윤이 아빠’, ‘여보’.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작 ‘나’라는 이름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죠. 회사에서는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과 점점 무거워지는 책임감 사이에서 버텨내야 했고, 집에서는 좋은 아빠와 든든한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렸습니다. 하루 24시간을 가족과 회사를 위해 쪼개 쓰다 보니, 정작 저 자신을 위한 시간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으니까요. ‘다들 이렇게 사는 거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관성처럼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녁이었습니다. 거실에 누워 뒹굴뒹굴하다가,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딸아이가 불쑥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는 꿈이 뭐야?”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내 꿈?’ 아이에게는 “나는 훌륭한 소방관이 될 거야!”, “나는 예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거야!”라고 쉽게 대답해주었지만, 정작 제 자신에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어릴 적 막연한 꿈이었다면, 그 꿈을 이룬 지금의 나는 과연 행복한 걸까. 아이의 순수한 질문 하나가 제 삶의 한복판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그날 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아내와 조용히 맥주 한 캔을 나눴습니다. 제가 느꼈던 공허함과 아이의 질문에 대해 털어놓자, 아내는 말없이 제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당신, 요즘 너무 앞만 보고 달리기만 했어. ‘김 부장’도 ‘서윤이 아빠’도 좋지만, 가끔은 그냥 당신을 위한 시간도 좀 가져.” 아내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는 듯했습니다. 그동안 저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삶의 무게를 누군가 함께 들어주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저는 의식적으로 저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주 사소한 변화부터 시작했죠.
매일 아침 습관처럼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 영상을 보던 것을 그만뒀습니다. 대신, 20대 시절 즐겨 듣던 낡은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잊고 있던 멜로디와 가사가 흘러나오자, 팍팍했던 마음이 조금은 말랑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창밖 풍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 세상은 그대로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제 마음의 여유가 달라졌습니다.
항상 구내식당에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던 습관을 버렸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회사 근처 작은 서점에 들러 30분이라도 책을 읽었습니다. 경제 경영 서적이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며 온전히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기분은 오후 업무에 새로운 활력을 주었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작은 노트를 폈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 스쳐 지나간 생각, 아이가 했던 예쁜 말들. 사소한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었기에 솔직할 수 있었습니다.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정리되었고, ‘오늘 하루도 꽤 괜찮았구나’ 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작은 시도들이 쌓이자, 제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늘 시간에 쫓기고 피곤에 절어 있던 제가 조금씩 웃음을 되찾기 시작한 겁니다. 온전히 저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니, 회사에서는 일의 효율이 올랐고 집에서는 아이와 아내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나를 위한 시간’이 가족에 대한 이기심이나 책임 회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자동차가 잘 달리기 위해 좋은 기름을 채워야 하듯, 나 자신을 먼저 돌보고 채워야만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좋은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다는 것을요. 나를 잃어버린 채 아빠와 직장인의 역할만 해내는 것은 결국 모두를 지치게 할 뿐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과거의 저처럼 멈춰버린 시간 속에 갇혀 있지는 않나요? 회사와 가정, 수많은 역할 속에서 진짜 ‘나’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거창한 변화나 대단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좋습니다. 좋아하던 음악을 듣거나, 짧은 산책을 하거나,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 그 작은 틈이 당신의 일상을, 그리고 당신의 삶을 조금 더 단단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라 믿습니다.
오늘, 당신을 위한 시간의 빈칸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