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퇴근길,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아스팔트 위를 무심히 스쳐 지나갑니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노래가 흐르고, 창밖으로는 매일 보던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하나둘 켜집니다. 제 손에 들린 서류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어깨를 짓누르는 하루의 무게. 30대 후반의 저는, 그렇게 엇비슷한 풍경 속에서 엇비슷한 하루를 복사하고 붙여넣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팀장이라는 직책의 무게를, 집에서는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빠라는 책임감을 짊어져야 했습니다. 치열하게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본 제 자리에는 ‘그래서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라는 물음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성장은 정체된 듯했고, 열정은 희미해졌습니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사치처럼 느껴졌고, 가족과 나 자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늦은 밤, 모두가 잠든 거실 소파에 홀로 앉아 맥주 한 캔을 따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던 시절이었죠.
변화는 의외로 아주 사소한 순간에 찾아왔습니다. 주말 오후, 거실에서 별생각 없이 아들과 블록 쌓기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참을 집중하던 7살 아들 녀석이 저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물었습니다.
“아빠는 뭐가 제일 재밌어?”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아이에게 “음… 아빠는 우리 아들이랑 노는 게 제일 재밌지”라고 모범 답안 같은 대답을 해주었지만, 제 마음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소용돌이쳤습니다. ‘나, 정말 뭐가 재밌지?’ 스스로에게 되물었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회사 일? 물론 보람을 느낄 때도 있지만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취미? 마지막으로 오롯이 저를 위해 무언가를 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습니다.
그날 밤, 아들의 질문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 ‘팀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 목록을 빼곡히 채우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 목록은 텅 비어 있었던 겁니다. 앞만 보고 전속력으로 달리기만 했을 뿐, 제 영혼의 연료가 바닥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것이 바로 제 마음을 잠식하던 공허함과 무기력의 정체였습니다.
그 작은 질문 하나가 제 삶의 태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더 이상 가속 페달만 밟으며 소진될 수는 없었습니다.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잠시 기어를 바꾸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의도적으로 멈추기’였습니다. 퇴근 후 아이들이 잠들면 으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TV를 켰지만, 그 시간 대신 책을 펼쳤습니다. 업무와는 아무 상관없는 역사책이나 소설을 읽으며 온전히 다른 세상에 빠져들었습니다. 처음에는 30분도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점차 그 고요한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아내와의 대화도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오늘 뭐 힘든 일 없었어?”라는 의례적인 질문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당신은 요즘 뭐가 제일 하고 싶어?”라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꿈과 생각에 귀를 기울이자, 무미건조했던 부부의 대화에 다시금 색깔이 입혀졌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각자의 인생을 응원하는 첫 번째 팬이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양’보다 ‘질’에 집중했습니다. 함께 있을 때만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아이의 눈을 맞추며 온전히 그 순간에 몰입했습니다. 아이의 서툰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바보 같은 질문에도 웃으며 답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웃음꽃이 더 활짝 피었고,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의 빈 곳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생의 속도를 조절한다는 것은 결코 뒤처지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과 주변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과정이었습니다. 30대 후반의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거창한 계획 대신 작지만 꾸준한 실천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하루 30분, ‘나를 위한 시간’ 확보하기: 퇴근 후, 혹은 이른 아침.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30분을 확보해 보세요. 독서, 음악 감상, 명상, 가벼운 산책 등 무엇이든 좋습니다. 이 시간은 소진된 에너지를 채우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쓸모없는’ 새로운 배움 시작하기: 당장 돈이 되거나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오랫동안 배워보고 싶었던 악기나 외국어, 그림 그리기에 도전해 보세요. ‘성과’에 대한 압박 없이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배움은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진짜’ 대화 나누기: 가족이나 친구에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요즘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과정 속에서 깊은 유대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40대를 앞둔 지금, 저는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여전히 아이들과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완주해 나가는 긴 마라톤이라는 것을요. 가끔은 천천히 걸어도,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리듬을 잃지 않는 것이니까요.
당신을 위한 30분, 오늘은 무엇으로 채우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