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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긍정 오뚜기 Dec 27. 2023

2023 한 해를 정리하며...

Chapter 4. 잘못과 속죄

살아가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실수와 잘못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잘못과 실수는 만회하거나 잊힐 수 없기도 하다. 애초에 저지른 일은 없던 것으로 할 수 없다. 나도 그걸 알고 있었고, 며칠 전에 친구들과 얘기하며 내가 고치고 싶은 나쁜 습관에 대해서 얘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고 얼마 있지 않아 그 지독한 습관은 나를 수렁에 빠뜨려 넣고 말았다.  내게는 애증을 느끼게 하는 교수님이 하나 있다. 그 교수님의 강의는 지루한 것 같으면서도 감명 깊고, 그 교수님의 과제는 귀찮으면서도 의미 있다. 결과적으로 내 심금을 울리고 도움이 되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학구열을 가지고 과제와 시험에 최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교수님도 나를 좋게 봐주셨고, 중간과 기말 둘 다 만점을 주셨다. 글쓰기 과제와 비슷한 시험들이라서 만점은 몇 명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시험지를 보고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시험지 확인을 하기 몇 분 전, 나와 다른 학과생들은 교수님이 이전에 깜빡하고 잊어버리신 보강을 하필 종강날짜에 딱 넣어서 그것도 세 시간 강의를 하시냐고 떠들어 댔다. 심지어 그날은 폭설이 내리는 날이고 영하 4도에다가 인문예대는 다른 단과대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누군가는 나보고 내가 그날 너무 열심히 해서 과제를 들고 오지만 않았어도 교수님이 그걸 보고 수업을 해야겠다고 맘먹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죄책감이 들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최대한 어필하려고 다른 학과생들과 동조하며 같이 교수님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말을 해댔다. 얼마 전에 술 마시면서 다시는 뒤에서 남의 얘기를 하지 않겠다고 할 말이 있으면 면전에다가 대놓고 말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다 잊어버린 채로 말이다. 나의 이 나쁜 습관의 기원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다. 초1 때부터 나는 똑같은 사람에게 왕따를 포함한 학교폭력을 당했고, 5학년이 되어서 다시 같은 반이 되었을 때 그녀는 나를 예전처럼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은근슬쩍 나를 몰아세웠다.


 그녀에게 목이 졸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학교에 있는 게 지옥이 되게 해 주겠다고. 그 결과 나는 이 반 저 반을 다니며 그녀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나쁜 행동들에 조금씩의 MSG를 뿌리며 원래의 이미지보다 두 세배는 나쁜 아이로 만들어 놓았다. 원래 그녀가 나쁜 걸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얘기를 계속 전하고 다녔고, 그녀의 완벽한 가면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나만 나쁜 사람으로 보았다. 선생님들 또한 그녀의 가면에 잘 속았는지 그녀가 이제까지 내게 해 왔던 나쁜 짓들을 믿지 않았고, 초1 때부터 그때까지 일관적이고 공통적인 모습으로 다들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친구들이 너의 변화된 착한 모습을 봐줄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야. 네가 조금만 더 변화하려고 노력해 봐. 그럼 친구들도 네가 이전에 했던 잘못들을 용서해 줄 날이 올 거야."


 이에 화가 났던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하던 짓을 멈출 때를 놓치고 말았다. 어느 날 그녀가 울면서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내가 나쁜 년인 건 나도 알아! 근데, 너는? 너는 아무 잘못 없어? 험담도 언어폭력이야! 너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좋은 사람으로 돌아갈 기회도 놓쳤어."


 혼란스러웠다. 묻고 싶었다.


 '그럼 나한테 이제까지 했던 잘못들에 대해서 사과할 때 한 번이라도 진심이었던 적이 있어? 진심이었다면 사과해 놓고 왜 또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계속 날 괴롭혔는데? 네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절대 믿을 수 없어. 너는 원래부터 나빴고 나는 평생 너를 용서해 줄 생각 없어. 너 때문에 내가 매일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시고 부모님도 그런 나를 보면서 얼마나 힘들어하셨는데...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 험담이 이제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점점 나를 괴롭힌 그녀와 같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작할 때만 해도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점점 두려워졌다. 언젠가는 내가 그녀와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점점 나 자신이 변해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녀를  딱 마주 보고 뭐라고 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할 때마다 내가 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앞에서 당당하게 싸울 때보다 나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았다. 하지만 뒤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는 게 명백한 잘못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와 다른 중학교에 입학한 그녀가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하튼 그때 이후로 나는 뒤에서 얘기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살면서 억울한 일은 점점 늘어나는데 대놓고 면전에다가 대놓고 말하기는 힘든 상황도 생겨났다. 속으로 참기에는 자꾸 속이 곪아갔고, 나의 나쁜 습관은 점점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그렇게 남의 얘기를 할 수도 있다고 주변에서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내 성격이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중간이 없는 사람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둘 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려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면 애초에 안 하는 게 맞는 인간인 것이다.  교수님의 실수로 우리가 다 원래 보강을 해야 하는 교실에서 30분 정도를 기다리고 그 뒤에 심지어 교수님이 30분 남은 상태에서 강의를 하시고 심지어 마치는 시간까지 넘겨 버리셔서 다음 수업에도 늦는 일이 생겼다.  그 일로 학과생들은 한동안 계속 그 얘기를 했다. 그 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수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들도 많이 오갔다. 나는 최대한 참으며 그래도 내가 좋게 보는 교수님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고, 교수님도 사람인데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하필이면 종강 날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결국 나쁜 습관이 활개를 쳤다.


 하필이면 교수님은 내 말이 끝난 다음 바로 문을 열고 들어오셨고, 나는 처음에는 그가 내 말을 못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의 태도는 눈에 띄게 냉담해지셨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걸 파악하고 있었던 나였기에 그가 삐졌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삐진 게 아니라면 나에 대해 실망을 했을 수도 있고, 어른이지만 그래도 그 일로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 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 죄책감이 들기 시작하자, 초등학생 때의 일이 떠올랐고, 눈물이 났다. 사람들은 눈물은 억울한 사람들만 흘리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찬 눈물도 있다. 적어도 잘못한 상대 앞에서만 안 흘리면 흘릴 자격은 있는 것이다. 죄책감은 내 피해의식과 연결되어 나는 곧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 나 자신을 분리하는 거야. 내게는 두 가지의 페르소나가 있어. 하나는 밝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남들의 조언을 잘 받아들이며 성장하며 기뻐하는 나 자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악마지. 이 악마는 남에게 은근슬쩍 상처 주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못된 짓을 일삼는 존재야. 이 악마는 다른 사람 눈치도 보지 않고 무조건 원하는 대로 굴며 그래도 원하는 건 뭐든 쟁취해 내는 똑똑한 존재지. 첫 번째가 마음에 안 들면 두 번째 가면을 꺼내면 되고, 두 번째인 악마가 마음에 안 들면 첫 번째를 꺼내 쓰면 되는 거야. 그러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


 첫 번째 가면을 쓰면, 내가 2학년이 되어서는 교수님을 찾아가서 직접 사과하며 잘못을 인정하며 비로소 그가 내게 가르쳐 주었던 글쓰기를 통한 자기 해방의 두 번째 단계를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책감과 상처를 이겨내는 방법에는 사과와 털어놓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이때, 주변 사람들과 악마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찾아가서 사과를 하는 것은 내가 편하기 위한 것이지 교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교수님은 신경도 안 쓰고 다 잊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또 그 일을 끄집어내서 오히려 일을 더 크게 만들어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교수님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들 수 있다고. 부모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렇게 너 속 편하자고 다 털어놓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하면 교수님은? 교수님은 이미 잊고 있었던 일을 너 때문에 다시 생각해야 하잖아."


 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단계 중 제일 중요한 단계를 빼야 하게 생겼다. 그제야 깨달았다. 어떤 일은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으니 애초에 처음부터 안 하도록 조심했어야 했다고. 엄마 말이 맞다. 성인이 되어서도 뒤에서 남의 얘기를 하는 것은 너무 저열한 일이다. 그것도 스승을.  현명하지 못한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그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만나야 한다. 그때 당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떠들어댔던 걸 무척이나 후회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아무 생각 없는 말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죽을 맛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러지 않기로 강하게 다짐했던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해서 또 힘들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관적으로만 생각하면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저질렀던 일로 인해 생겨난 결과들은 무조건 내가 감수할 생각이다.  학점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교수님이 나를 대놓고 미워하시더라고(그러실 분은 아니지만, 공/사 구분이 확실한 분으로 파악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다 감수할 생각이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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