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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긍정 오뚜기 Feb 11. 2024

조급함을 대하는 자세

적당히라는 말이 쉽지 않음을 다시 한번 더 깨달으며...

 알바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조급하다는 말을 계속 듣는다. 고쳐야 한다는 걸 잘 알지만 마음이 조급해질 때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당장 내 앞에 있는 일 밖에 안 보이고 배려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당장 앞에 있는 일도 벅차고 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알바를 하기 전 항상 하던 고민이 있었다. 조급한 데다 동작도 느리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머리가 빨리 늘지 않는 스타일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종류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일머리가 없는 사람들은 제발 일을 하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글이었다. 반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답답해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력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뒤에서 또 욕을 먹으면 일머리 없는 사람들도 서러움을 느낀다. 나는 알바를 하면서 내가 실수한 것들을 매일매일 메모해 놓고 주말이 되면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실수를 안 하려고 시뮬례이션까지 하다 보니 매일 밤 꿈에 내가 생산하는 식품들과 일하는 현장이 나와서 이불킥을 한다. 일을 안 하고 있을 때는 그곳에 대한 생각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정말 열심히 하고 싶은 것들에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 그게 안 된다. 


 내 성격이 중간이 없어서 쓸데없이 너무 열심히 해서 손해를 보거나 다 자포자기해서 엉망이 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 전자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적당히 잘하고 싶어서 대학 시 수업 때 '적당히'라는 시를 써서 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게 잘 되었다면 그 시도 탄생하지 않았겠지. 개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시라서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쓴 시처럼 적당히가 잘 안 될까 봐 한 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해지는 시였다. 한편으로는 내 시를 읽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글을 쓰려면 내가 무던히도 노력을 더 해야겠지만 말이다. 알바를 하면서 배우는 게 많아지면서 삶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그 변화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쳐서 그만하고 싶기도 하다. 불평과 불만이 줄어든 것은 좋은 점이었지만 때로는 너무 과도하게 타인만 위하다가 나 자신을 내가 돌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하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도 안 좋다는 걸 깨달았다. 연휴에 삼촌네, 이모네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다 보니 이런 고민을 나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고, 어른들도 안 힘든 게 아니라 평소에 다 참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술을 마시면서 그때서야 한 번 다 털어버리고 눈물도 쏟아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이모는 울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계속 눈물을 참고 싶어 했고 울먹거리며 자꾸 슬픈 얘기를 꺼내는 엄마를 말렸다. 결국에 그 자리는 모두의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무뚝뚝함의 대명사라 생각했던 오빠까지 울 지는 몰랐다. 나는 평소에 다들 웃고만 있어서 내 기준에서 힘들 것 같다는 일들이 나보다 더 어른인 사람들은 살다가 너무 단련이 되어서 그 정도는 그냥 넘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도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절반은 맞는 말이나 절반은 틀린 말이다. 속에 쌓아놨다가 한 번에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어떤 이들은 그냥 꾹 누른 채 살아가겠지. 그래서 곁에서 다들 울 수 있을 때 울라고 독려해 주는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조차 털지 못하면 너무 힘든 걸 알기 때문이다. 매번 술자리에서 우는 것은 그리 좋은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그 조차도 보듬어 줄 수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라면 말이다. 꼭 모든 자리가 행복을 나누기 위한 자리일 필요는 없고, 꼭 한 가지만을 나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때에 따라서는 행복도 슬픔도 힘듬도 골고루 나눌 수 있는 자리도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정말 서로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의 모임일 것이다. 그게 내가 어제의 자리가 불편하지 않고 행복하다가 느낀 이유일 것이다. 어제가 있어서 덕분에 나는 이모와 이모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모부는 정말 좋은 분이셨다. 우리 아빠를 진심으로 대해주니 고마웠다. 아빠는 나와 성격이 같아서 주변 사람들도 몇 명 안 되고 정말 노력파지만 쉽게 주변에서 알아주지는 않는다. 

 

 그런 성격을 내가 닮아 나온 것이겠지. 나는 외모도 성격도 아빠 판박이니 말이다. 때로 불쑥불쑥 나오는 엄마의 성격이 반가우면서도 대부분 아빠의 성격으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답답해했다. 하지만 그런 내 성격엔 장점도 있었으니... 바로 끈기와 인내심이었다. 그리고 어제의 아빠처럼 주변에 저렇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쉽지 않은 노력과 스스로와의 싸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나는 얼마나 지나야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생길까. 이제 겨우 스물 하나가 되는데 얼마나 더 큰 일들을 겪어봐야 더 단단해지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생길까라는 생각을 하며 씁쓸함을 삼켰다. 행복한 자리였지만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그냥 듣기만 해도 재밌었다. 더 경험을 쌓고 나이가 들면 나도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있겠지. 나이는 성인이지만 아직 사회에 발만 담근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나도 이 나이면 충분히 겪을 만큼 겪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 착각은 내가 경험을 하루 하루 해나갈수록 점점 깨진다. 

 

 성장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고난과 시련이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굳이 열심히 찾을 필요는 없다. 살다 보면 내가 찾지 않아도 하나하나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제대로 살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성장에 성공하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고 과거에 불평했던 것들은 새발의 피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스스로가 무지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때 당시의 나로서는 그럴 수 있었던 때라고 미련을 털어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자책이 너무 커지면 현재를 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지영 강사님이 그러셨다. 세상은 긍정적인 사람들이 이끌어가게 되어 있다고. 그 말에 나는 그저 이끌림을 당할 사람인가 보다 이러다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또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힘든 상황을 겪는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스스로에게 더 편한 길이기 때문이다. 긍정이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때 엄마가 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 너는 너무 편하게 살아서 그렇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엄마 말이 맞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말을 들여다볼 때 알아야 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엄마는 내가 바쁘지 않고 애매하게 편해서 우울한 게 아니냐고 했다. 완전히 인정할 순 없어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정말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야 죄책감과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그 느낌이 들면 하나의 방안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다시 돌아가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 다시 마주하기 힘들고 영원히 다 놓은 채로 있고 싶더라도 괜찮다고 다시 마주할 힘이 생겼다고 독려하며 한 발 한 발 다시 딛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 그 과정이 시간이 좀 많이 걸리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조급함이 생겨도 조금만 힘을 내서 그 조급함이 현재의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조급함과 불안은 서러움을 데리고 온다.


 그 서러움은 다시 내 발목을 잡게 되고 극복은 더욱 더뎌진다. 누군가 불안에 떠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참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글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걸 수도 있지만 애초에 삶에 불안이 없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면서 나는 그 글귀를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안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 불안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삶은 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효율적이란 걸 깨달았을 때 불안을 덜어내기 위한 노력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글을 쓰는 것은 하고 있으니 절반은 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글을 쓸 때만 불안이 사라지고 글쓰기를 끝내면 불안이 다시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아예 없애려면 근원이 되는 것을 파헤쳐 보는 것인데 그게 제대로 될 때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되는 데까지 시도해 보기로 했다. 내가 알바에서 실수하는 것을 글로 정리하는 것도 이 방법에 해당된다. 다만 시작하기가 힘든 방법일 뿐이다. 해놓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주사를 맞을 때는 아플까 봐 무서워하다가 끝나면 아무렇지 않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완벽한 답은 없는 것 같다. 대놓고 정면 돌파하는 것도 항상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현실을 도피하는 것도 계속되면 습관이 된다. 역시 무엇이든 적당히... 과유불급이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그게 잘 안되지만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바라는 정도와 비슷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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