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익스펙토 페트로눔'
우울증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잃었고, 또 다른 많은 것을 얻었다. 다시 연락하게 된 인연들이 가끔씩 보내주는 카톡은 광고 메시지로 가득하기만 했던 내 카톡 창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고,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기 싫어했던 내 발자국은 어느새 버스를 타고 창가를 통해 내리쬐는 햇살로 광합성을 가능케 해 주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이돌을 좋아하던 난 이제 가사가 예쁜 노래를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간의 덕질을 청산하며 그간 좋아했던 그들을 놓아주었다. 우울증으로 인해 갑작스레 바뀌어 버린 취향과 기호, 그리고 쪄버린 살과 이와 반대로 홀쭉해진 통잔잔고 마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조금씩 쌓아 올리고 있는 '자아 효능감'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주 일요일, 토익 시험을 최선을 다해 쳤고, 끝난 후에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다. 오로지 '나'를 위해 시작한 다이어트조차 즐거워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평안하게 살고 있던 어느 날, 친구 목록에 뜬 어떤 사람이 나에게 팔로우를 요청했다. 나는 낯익은 이름에 아무 생각 없이 맞팔을 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서 디엠이 왔다. 아, 초등학교 동창이구나. 우리는 서로 반가워하며 안부를 묻고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그 친구랑 대화를 주고받는 내내 심장이 불쾌하게 뛰며 왠지 느껴봤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자 서서히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초등학교 때 나를 괴롭혔던 무리 중 한 명, 내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그 무리의 일원일 뿐이었던, 통제적인 친구, 나를 무안하게 만들고 친구들을 우르르 데리고 가서 나를 몰아붙였던 아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던 탓일까. 그 아이와 보냈던 좋은 얕은 순간들만 대화 중엔 떠올랐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같이 영화를 봤던 것, 그리고 내가 성적을 잘 받아 엄마가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가자고 했을 때, 같이 데려갔지만 오히려 거기서 나를 왕따 시킨 그 친구, 결국에는 나를 힘들게 했던 아이들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이 되었을 때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었지.
그 친구는 다 잊고 있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다 잊고 나를 그냥 공부 잘하고 영어 잘하는 범생이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쳐서 얼른 차단해 버렸다. 이때까지 피해온 인연을 마주한다고는 했지만 이런 인연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대화를 디엠으로 하기 전에 문득 들어가 본 그녀의 인스타는 화려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친구로 인해 좋았던 기억도 마음에 들었던 멍도 말이다. 내 책에 나를 힘들게 했던 친구들을 용서한다는 내용을 추가했었다. 그중 그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지 하나하나 생각이 안 날 뿐이었다. 초등학생 때에는 너무 어려서 내가 당한 것이 학교폭력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때도 자책을 했다. 지금은 그저 그 애들과 어떤 식으로라도 엮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타인을 자신의 통제에 두려는 성향의 사람들을 지금까지 다 피하고 있었다. 그 일들로 인해 심지어 내 엄마조차 멀리하고 싶어 졌었다. 하지만 엄마와 잘 지내면서 그리고 내 안에 있던 것들을 다 쏟아내고 난 후에, 나는 여유를 얻었다.
난 사람을 애매하게 대하며 교묘하게 행하는 폭력을 제일 싫어한다. 하지만 더 이상 과거에 매여있고 싶지 않다. 그것도 1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에 말이다. 그들은 내게 진실된 사과를 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냥 용서하니까 그냥 내 인생에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를, 다른 사람을 통해 들어보니 자신의 업보에 의해 대가를 치르는 친구도 있었고, 디엠에서 다시 만난 친구처럼 아무렇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다 상관없다.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더 이상 초등학교에 머물러 있지도, 중학교에 머물러 있지도, 고등학교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나는 현재에 있으며 나아가고 있다. 엄마는 그 당시 내게 친구가 많이 생기길 바라며 나랑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들의 엄마랑 사교 모임을 일부러 가졌던 걸 내게 사과하셨다. 엄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기에 딱히 엄마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냥 사람 보는 눈이 발달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이제는 더욱 발전했으니 나에게 진심이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손을 내밀어보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다. 뭐, 내 삶이 가장 중요해진 지금, 타인의 삶이 그리 크게 궁금하진 않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오늘 내가 느꼈던 소소하고도 큰 행복들에 집중하고 싶다. 해리포터의 '익스펙토 페트로눔'의 힘은 과거의 긍정적인 기억에 의해 미래의 고난을 이겨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미래에는 과거의 행복으로 남아 무기가 되어줄 긍정적인 이 감정들. 벌써 느끼고 있다. 나는 이로 인해 힘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