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른이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30대 미혼 공무원의 성장일기

by 쵠정

"철밥통 직업을 가진 자가 하는 걱정"



"너희는 치열한 경쟁도 없지, 노후도 보장되지, 솔직히 편한 건 사실인 것 같은데?"


내 직업은 지방직 공무원. 내가 공무원임을 아는 사람들과 알게된 사람들 10명 중 10명은 이렇게 말한다. 고물가, 고금리, 경기침체 '삼중고'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웃으며 넘기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일을 열심히 하거나 심지어 잘하기까지하는 공무원에게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공직사회도 단순히 자리보전이 아닌 자기계발과 능력향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긴하다. 그러나 남들보다 조금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또는 성과가 없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내 자리가 사라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년까지 일자리가 보장되는 '철밥통' 직장이 맞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내 옆자리 직원도 철밥통'이라는 게 제일 문제다.



2023년 7월, 인사발령이 나며 새로운 부서로 이동을 했다.


"니 어떡하노? 너희 팀장 승진만 생각하고 일은 안하기로 소문났잖아. 심지어 후배들 실적도 본인 실적으로 달라고 부탁하고 다닌다더라."


주변 동료들이 나에게 걱정어린 위로를 전했지만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생각과 나와는 잘 맞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업무를 익혔다. 그리고 역시 나와도 안맞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oo씨, 이번에 일자리사업 선정 대상자들 중에 우리 시로 전입한 사람들 명단있지? 그거 나한테 줄래?"


출생률 감소와 청년 수도권 유출 문제로 인한 지방소멸위기는 지자체가 당면한 문제 중에 가장 심각하다. 우리 시 또한 인구유출을 방지하고 유입을 독려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직원 개인별로 인구유입 실적을 매겼고, 그 실적에 따라 인사 가산점을 줬다. 당연히 승진에 목마른 팀장님은 전입자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점수(?)였다.


물론, 당장 승진을 앞두고 있지 않은 직원들은 1~2명 정도 실적만으로 체면치레만 한다. 그래서 타 부서에서는 종종 부서 내 승진후보자들에게 인구 실적을 몰아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승진하고 나면 본인의 실적을 또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일종의 상부상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팀장님은 정도가 너무 심했다. 후배들이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적도 본인에게 달라고 이야기하고 다니셨다. 발령 받은 지 1~2년밖에 안 된 신입 후배들은 어쩔 수 없이 실적을 팀장님에게 드리는 눈치였다.


나는 그 해 일부러 단 한 명의 인구유입실적도 쌓지 않았다. 뺏길바에 아예 안하고 말지. 내 인사 가산점이 0점일지언정, 그녀의 승진에 힘을 보태주고 싶은 생각이 1도 없었다.



"ㅁㅁ씨, 이번에 우리 시 고용실적 잘 나왔지? 그거 보고자료 만들어서 오늘 오후에 시장님 결재 들어가자."


일자리와 고용률은 지방자치단체 지표 중 꽤나 중요하다. 양질의 일자리는 인구 유입의 주요 이유이고, 높은 고용률 또한 활발한 지역 경제 상황을 말해준다.


"시장님, 이번에도 우리 시 고용실적이 지난 분기 대비 좋습니다. 자료를 보시면 숫자 높은 거 보이..."

"아니, 어느 숫자! 김팀장, 무슨 항목이 어떤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야지 다짜고짜 뭐가 다 좋다는거야! 다음에 다시 보고해!"


나와 함께 시장님 보고에 들어간 팀장님은 내가 작성한 보고서 전반에 대한 숙지없이 전국 1등, 도내 1등과 같은 숫자만 보셨나보다. 그러니 보고서 어느 부분에 어떤 데이터가 있는지도 모른대 시장님께 보고내용을 차근차근 설명드리기 못했다. 그 좋은 보고내용을 가지고 칭찬은 무슨, 꾸지람만 듣고 나온 날이었다.



그 뿐이겠는가. 양은냄비처럼 기분이 좋았다가 뒤돌아서 갑자기 화를 내는 성격에 팀원 모두 팀장 눈치보는데 도가 트였다. 단 한사람만 빼고.


2023년 7월 신규로 발령받은 후배 직원이 처음으로 업무 보고서를 작성한 날이었다. 일반적으로 공직에서 작성하는 양식에서 조금 벗어났고, 용어 사용도 조금 서툴렀지만 담당 사업을 충분히 숙지한 후 요약해서 만든 자료였다. 아마 일반적인 팀장님이 그 보고서를 봤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오, 처음 썼는데 잘 적었다. 고생했네. 그런데 이 부분은 이렇게 이렇게 수정해보자."


물론 눈치없는 막내는 팀장님이 저조한 업무 실적으로 시장님께 크게 혼이 나고 돌아오셨을 때를 적절한 보고 타이밍으로 판단했다. 본인이 처음 작성한 보고서를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빨리 검토받고 싶었단다.


"보고서의 기본도 안되어 있는 걸 나보고 보라고? 다시 제대로 쓰고 가져와봐."

팀장님의 책상 위로 미끄러지듯 서류가 던져졌다.


보고서 수정 작업을 도와주며 막내를 위로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후배들에게 저렇게 무례한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해 연말 팀장님은 과장으로 승진 후 다른 부서의 과장으로 보직을 이동했다. 소문을 듣자하니 과장님이 된 후 무서울 것 없는 독불장군이 되었단다. 부서 회식자리에서 본인 마음에 드는 직원 순위를 매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을 꼭 집어 지적하는 이상한 사람말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퇴직 때까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분이다.



사람들이 공무원을 '요즘 시대 돈 벌기 가장 쉬운 직업, 월급 루팡, 무사안일, 철밥통'으로 표현하면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어느순간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10년 넘게 일하다보니 어느 정도 일 처리 능력이 올랐고,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오고, 업무량에 따라 내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보니 워라밸도 지켜지는 이만한 직업은 없는 것 같다.


특히, 후배들에게 업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도 버티면 과장 보직을 다는 공직사회다. 일 잘하는 동기들보다 조금 늦을 수는 있어도 결국은 승진시켜주더라. 인사발령 명단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열심히 일할 이유가 있을까, 받는 돈을 같은데'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채운다.


그럴 때면 반면교사로 삼았던 선배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남보다 더 잘하는 건 둘째치고 피해는 주지말자, 내 업무에 구멍은 내지말자. 그래야 내 동료가 '내 옆자리 사람도 안나가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최소한 '철밥통' 직업을 가진 내가 이 조직에 머무르며 월급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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