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12
서울에는 ‘능’으로 끝나는 지명이 많다. 선릉, 정릉, 태릉, 홍릉, 헌인릉, 동구릉, 서오릉, 그리고 능동과 공릉동까지. 우리는 그 이름들을 익숙하게 부른다.
1970~80년대 서울에서 자란 이들에게 왕릉은 엄숙한 성역이라기보다 소풍 가던 숲이었다. 잘 관리된 동네 뒷산처럼 일상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이 숲들은 단순한 녹지가 아니다. 누구의 무덤이 능이 되었는가, 누구의 이름이 남았는가는 권력의 결과였다.
왕릉은 곧 정치였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다. 『경국대전』은 왕릉을 도성 십리 밖, 백리 이내에 조성하도록 규정했다. 왕은 죽어서도 수도의 질서 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 결과 서울과 그 인근은 왕릉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되었고, 왕릉은 시간이 흐르며 지명이 되었다.
무덤의 명칭도 엄격했다.
임금과 왕후는 ‘능’, 세자와 후궁은 ‘원’, 그 외 왕족은 ‘묘’.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끝내 능이 되지 못했다. 죽음 이후에도 권력의 판결은 유효했다. 왕릉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였다.
비운의 왕, 단종
강원도 영월의 단종 무덤은 오랫동안 ‘노산군묘’로 남아 있었다.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240여 년이 흐른 뒤, 숙종 때인 1698년에야 복위되어 ‘장릉’이 되었다.
무덤의 격상은 곧 권력의 재판결이었다.
숲으로 남은 권력, 광릉
남양주의 광릉에는 세조와 정희왕후가 묻혀 있다. 세조는 생전에 능역을 조성하며 주변 산림 보호를 명했다. 그 결과 이 일대는 500년 넘게 훼손되지 않은 숲으로 남았다.
오늘날의 광릉 국립수목원은 자연 보호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그 출발은 절대 권력의 공간이었다. 권력은 때로 숲의 형태로 남는다.
선릉과 정릉, 폭력의 기억
테헤란로 한복판의 선릉과 정릉은 현대 서울과 가장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왕릉이다.
선릉에는 성종이, 정릉에는 중종이 묻혀 있다. 그러나 두 능 사이에는 왕실 내부의 폭력이 놓여 있다. 성종 대의 긴장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졌고, 중종은 그 연산군을 몰아내며 즉위했다.
나란히 자리한 두 능은 조선 정치사의 단절과 연속을 동시에 보여준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도굴당한 사건 역시, 권력의 상징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드러낸다.
태릉과 강릉, 가려진 왕
노원구의 태릉은 익숙하지만, 그 옆 강릉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태릉의 주인은 문정왕후, 강릉의 주인은 그의 아들 명종이다.
생전에도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명종은 그 그늘에 있었다. 무덤 역시 그 구도를 닮았다. 왕릉조차 생전의 권력 관계를 반복한다.
복수당한 능, 성북 정릉
성북구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 계모에 대한 분노를 무덤에까지 투사했다. 능은 도성 밖으로 옮겨졌고, 방풍석은 청계천 광통교 보수에 사용되었다.
서울의 한 다리에는 왕자의 난의 흔적이 스며 있다.
홍릉이 두 개인 이유
동대문구 청량리의 홍릉 수목원과 남양주 금곡의 홍릉. 같은 이름의 왕릉이 두 곳에 존재한다.
청량리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이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사망했을 때, 일제가 소위 『왕공가궤범』을 근거로 ‘왕릉’ 명칭 사용을 제한하려 하자, 조선 왕실은 기존 홍릉을 이장해 합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남양주에 새로운 홍릉이 조성되었고, 청량리의 옛 홍릉 자리는 수목원이 되었다. 이름은 지켰고, 자리는 옮겨졌다.
왕조는 사라졌지만, 기억은 공간에 남았다.
서울은 왕릉 위에 세워졌다 서울의 왕릉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누가 능이 되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왜 옮겨졌는지는 모두 권력의 결과다. 서울 곳곳의 ‘능’이라는 지명은 한 왕조의 승패 기록이다.
도로가 놓이고 학교가 세워지고 숲이 조성되었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권력의 역사가 묻혀 있다.
서울은 오늘도 왕릉 곁을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