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한때 타임캡슐 만들기가 유행했던 시기가 있었다.
주말 저녁 황금시간대에 방송했던 여러 예능프로그램에서는 각종 유명인들이 출연하여 자신들의 추억을 담은 타임캡슐을 만들고
땅에 묻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보여줬었고,
9시 뉴스에서는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를 타임캡슐에 봉인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도하여 한 세대의 모진 풍파를 인내해 온 사람들에게는 뭉클한 감동을, 다가오는 시대의 주역이 될 사람들에게는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았다.
이렇듯 엄청난 변화의 순간,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에서는 감동과 희망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상실과 두려움이라는 양가적인 감정도 동시에 확산되었다. 유난히 종말론과 음모론이 세상을 뒤덮었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과 희망 등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저무는 1900년대를 기억하고 다가오는 밀레니엄 시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행에 유난히 열광적이었던 전국의 초딩들의 학교에선 “10년 후의 나에게”라는 주제로 전교생이 타임캡슐을 만들어 학교 놀이터 한편에 묻는 행사를 줄기차게 기획하였다.
우리는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자신에게 쓰는 편지와 즐겨먹던 간식, 애장품 등을 상자 안에 넣고 운동장 가장 구석진 곳 모래밭 깊숙하게 묻기로 하였다. 약속의 날, 각자 고심해서 만들어온 타임캡슐 상자와 긴 노끈, 삽, 라이터를 가지고 운동장으로 모였다.
“내가 책에서 봤는데, 땅을 파면 뱀이 나올 수도 있어. 땅을 파다가 뱀이 나오면 네가 이 노끈으로 뱀의 목을 졸라. 그래도 죽지 않으면 내가 삽으로 머리를 때릴게. 뱀이 기절하면 네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 돼.”
우리는 비장히 맡은 바 역할을 정한 후 일사불란하게 삽으로 땅을 팠고, 다행히 뱀은 나오지 않아 무사히 타임캡슐을 묻을 수 있었다.
한동안은 바람이나 빗물에 타임캡슐이 유실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같은 자리를 여러 차례 찾아가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시들해져 나중에는 타임캡슐이 있는 자리가 기억이 나지 않게 되었고,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내가 타임캡슐을 묻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를 지나갈 때,
어릴 때 자주 먹던 떡볶이 가게의 사장님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불현듯 옛 친구 생각이 떠오를 때,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
운동장 어느 깊은 곳에 묻어뒀던 타임캡슐처럼 나의 기억의 파편들도 불쑥 떠오르곤 한다.
그 옛날 학교 운동장에 묻었던 수많은 아이들의 타임캡슐들과 “10년 후의 나에게” 썼던 수십 장의 편지들은 희미해진 기억만큼 바래진 종이가 되어 그들의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있다가 모래사장에 부는 바람처럼 강한 바람에 때로는 수면 위로 드러났다가도 다시금 깊숙이 잠기곤 할 것이다.
삶은 마치 열차와 같이 어디론가 전진하고 있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진다.
반복되는 같은 장면은 쉬이 잊히지고 때로는 작열하는 태양을, 또는 끊임없는 비를 만나게 되기도 하지만 어떠한 풍경은 가슴속 깊이 맺혀 응어리처럼 남기도 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단 한 번의 스침에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그러다가 간혹 갈림길을 잘못 들어 노선이 바뀌기도 하지만 멈추고 싶은 간이역을 만나면 잠시의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게 인생일 것이다.
그 언젠가 가슴속에 묻어놓은 타임캡슐 같은
잃어버린 순간이 우리의 삶을 때로는 무너지게도
때로는 지탱하게도 할 것이며
우리는 모두 목적지를 모르는 열차처럼 필연적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나는 삶의 언저리에서 만나는 풍경들처럼 잊혀질 수밖에 없는 그리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