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 Jun 03. 2023

런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2022년 여름의 런던행 입질

여름이었음. (진짜로)


레고 아키텍트 쿠푸왕 대피라미드와 애써 침착을 가장한 발가락.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 날이 있잖음. 마침 주문하고는 잊고 있던 레고 아키텍트 신작 쿠푸왕 대피라미드가 똿! 도착한 거임. 끼요오오옷- 간만에 열정을 불태울 주제의 대작이 나와서 굉장히 흥분한 상태이긴 했지만, 규모면이나 복잡성을 고려할 때 느긋하게 요모조모 즐기며 작업하려면 2박 3일 정도의 견적이 나오는 작품(!)이었음. 끊김 없는 작업을 진행하려면 아무래도 시일을 매우 신중하게 골라야 했기 때문에 일단 박스 포장 채로 전시 및 감상에 들어가 도착의 여운을 즐기기로 우선 결정(하는 바람에 결국 해가 바뀐 후에야 경★피라미드 완공★축이 되는 대참사가 일어남).


전국 품절이었던 마음에 드는 데님 점프수트를 우연히 구입했고 동생이 스테고사우르스 팔찌 참을 사줬고 스벅에서는 여름이닷-싶은 신작 트로피칼 음료를 내놓았던 2022년 여름의 초입. 그날따라 선선한 날씨에 기분 좋게 출근한 업장에서 청천벽력의 보이스톡이 걸려온 거임. 발신자는 영국 분사 일로 런던에 가 있던 나의 보스. 아직 새벽 시간대였던 런던에서 카톡이 아닌 보이스톡을 굳이 걸어왔다는 건 매우 높은 확률로 좋은 상황이 아님. 일단 심호흡을 하고 보이스톡 연결. 늘 그렇듯 본론부터 간결하게 꺼내지 못하는 화법으로 30분을 낭비한 후 겨우 들은 전화 목적은, 너말야 런던에 와줘야겠어, 좋지? 였음.


보스와의 보이스톡 후 쉬익쉬익 업장을 배회하는 나를 동료가 찍어줌.


안 좋아욧- 단칼에 거절함. 그러나 나의 보스는 거절을 거절함. 그녀의 계획 속에 이미 난 런던 업장의 동료가 되어 있었던 거임. 영어 못해욧- 런던 업장에 도움 안 될 거얏- 서울 업장도 바빠욧- 겸손이 아니라 정말 치가 떨리게 싫어서 거절하는데, 응 아니야 영어 하는 거 알아- 응 아니야 도움 돼- 응 아니야 서울 일은 좀 미뤄- 식으로 거절을 거절함. 아이폰이 다리미 수준으로 달궈진 후에야 간신히 통화가 마무리됐고 결과는 판정패.


엄살이 아니라 정말로 서울 업장은 상상 이상의 고난을 겪는 중이었음. 매 여름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유물관은 상황이 정말 처참하다 못해 악랄한 수준. 현재 진행형인 이집트 컬렉션 도록은 지지부진한 진행속도로 연구원들 모두 지쳐가는 상황에 갑자기 인원이 런던 업장 파견? 장난함? 우리가 런던에서 지원을 받아도 모자란 판국에. 게다가 대강 눈치를 보니 런던 파견 업무는 대략 개고생이 예약된 판이었음. 보스가 요리조리 피해 가며 중언부언한 통화의 요는 런던 업장이 건물 이전을 했고 컬렉션의 아카이빙 작업을 믿고 맡길 인력이 없는 상태라는 거. 하필 서울에서 내가 아카이브 담당에 최장 근무자였고.


통유리벽은 매우 힙하지만 폭우에는 속절없어 가엾은 부처님께 뽁뽁이 장삼을 공양드림 (죄송)


한마디로 서울 업장 일을 대강 할 수 있는 데까지 마무리를 치고 일시 중단하고 런던 업장에 파견을 가 잔뜩 벌려진 일을 처리한 후 다시 돌아와서 서울 일을 해야 하는 수순. 삼재의 끝자락에 아주 혹독한 날재를 겪는다 싶었음. 더 최악인 것은 정확한 출장 시일이 미정인 상황. 보스가 커몽- 시전 하면 부랴부랴 준비해서 날아가야 하는 거. 하도 기가 막혀서 시름시름 앓는 와중에 해외 출장 부럽다고 징징대는 미친 넘들도 있었음. (이 정신 나간 것들은 출장이 해외여행인 줄 앎) 같은 파트면 니가가라 런던- 해버리는데 다른 부원들이라 도움도 안 되고, 같은 유물관 연구원들은 척 보니 개고생인지라 측은지심으로 관망할 따름.


시간은 참으로 속절없이도 흘러버림. 보스 콜이 언제 올지 몰라 아등바등 서울 업장 일을 도장깨기 식으로 격파해 나감. 당시 신입 부원도 있고 업무분장이 명확한 편이라 유사시 대응 매뉴얼도 만들어야 해서 대략 혼이 나갈 지경이었음. 한 달 정도는 런던 파견이 취소되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름 희망도 있었으나 일이 그렇게 풀릴 리가. 10월에 당장 입국하라며 K 항공권이 전송됨. 와우- 출국까지 일주일도 안 남았고 처리할 일은 당연히 일주일 분 이상임. 이젠 정말 런던 갔다 와서 해야 하는 거임.


벌써 D-1, 시바.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진·본문 불펌 안 됨.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 이 거지같은 섬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