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집에 가고 싶음
빼도 박도 못하게 다시 런던이군.
시차 때문인지 새벽 5시에 일어남. 사실은 배가 고파서 깼음. 환기 겸 침실 창문을 열고 남의 집 뷰로 시작하는 런던에서의 첫 아침 풍경. 대체 뭐 하는 집이길래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대나 했는데 꽤 좋은 호텔이었음. (밤에는 매일 같이 파티가 열림.) 숙소에 와이파이가 설치되기 전까지 이 호텔 와이파이를 잘 잡아서 사용함. 고맙읍니다 고맙읍니다
어젯밤에 청포도 남긴 것과 파인애플 새 팩을 흡입. 파인애플은 먹다 보면 혓바닥이 얼얼하기 때문에 우유로 중화를 시켜야 함. 저지방우유는 쳐다도 안 보는 사람으로서 런던의 홀 밀크는 매우 느끼하고 좋음. 막스앤스펜서 식료품가게 oem 우유는 그 정수라고 할 수 있음. 처음에 마시다가 유지방 크림을 잘못 산 거 아닌지 확인했을 정도.
런던 집은 메이페어의 고급 아파트. 업장과는 두 블록 거리지만 이곳도 갤러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공간임. 덕분에 19세기 유리기를 요리조리 피해 17세기 방식의 일방향 여닫이 경칩 고정 개폐식(...) 창문을 열어야 함. 방충망이 없어서 엄청 쫄았는데 (곤충공포증) 추워지는 계절이라 그런지 들어오는 벌레가 없어 천만다행. (물론 거미와 지네는 가끔 만남.) 유물과 더불어 사는 방식은 서울 업장과 같지만 귀찮기도 매한가지로 같음. 그리고 난방 방식에서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음. 하단의 철망 장식을 떼고 매우 극단적인 라디에이터를 수동으로 조작해야 함. 이러니 전 세계가 온돌에 기반한 본국의 보일러 시스템을 찬양할 수밖에.
하필 파견 시기에 런던 집 맞은편에 위치한 7성급(?) 호텔이 리노베이션 공사 중. 작업 시간과 내 출근 시간이 겹쳐서 소음에 고통받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때쯤에는 이미 작업을 시작한 상황이라 환기할 때 되려 먼지를 들이는 건 아닌지 괜찮은 걸까 이거- 매일 고민함. 그리고 딱 이 시간에 웨스트민스터시티 쓰레기수거 차량이 지나감. 런던에서 쓰레기 배출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런던 시민인 업장의 다른 직원들에게 물어봤는데 걔들도 오락가락 하는 것 같았음. 뭥미. 청소 스탭이 건물 관리자한테 물어보고 알아서 처리하기로 했는데 가끔은 직접 밤에 검은 봉투에 넣어서 내놓으면 새벽에 수거해 가는 듯.
집에서 업장까지는 도보로 10분 안짝. 그래도 첫날이니까 30분 전에 출발함. 잠시 후 이 결정을 엄청나게 후회하게 됨. 메이페어는 런던에서도 유서 깊은 부촌이라 그런지 다들 진짜 세련되게 잘 입고 다님. 세상 잘난 런더너들은 다 여기로 출근하는 줄. 본인 업장은 딱히 의복 규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괜히 튀어서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검은 티, 검은 후드, 검은 바지, 검은 운동화, 검은 백팩만 챙겨갔단 말임. 근데 여기는 남녀 불문하고 다 명품으로 휘감은 정장 차림이라 되려 돋보이는 형국이 됨. 우중충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터덜터덜 돌아다니는 나를 되려 다들 피해 가는 듯한 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듯. 뭔가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 취급을 받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껄껄.
런던 파견의 가장 큰 이유는 갤러리 이전에 따른 아카이브 구축. 이사하기 전의 업장 위치는 숙소에서 더 가까웠음. 이전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 렌트가 안 나갔는지 여전히 업장 로고가 보였음. 아무튼 슬금슬금 현 업장에 도착했는데.
개장 30분 전. 역시나 출입문이 닫혀 있음. 뭐 너무 빨리 왔으니 이해함. 근데 도어락이 열쇠로 따는 자물쇠인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낌. 런던 업장은 세콤이나 전자식 출입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럼 보스가 올 때까지 밖에 서서 기다려야 하는 건가. 세상에. 20분 간 멀뚱멀뚱 서 있으려니 20대로 추정되는 백인 1, 흑인 1, 아랍계 1이 차례로 도착해 담타를 시작함. 내가 아는 런던 스탭은 G박사뿐인데 이이는 40대 이탈리안임. 한참 너구리소굴을 형성하던 애들 중 아랍인 1이 급 다가와서는 안녕 혹시 당신이 서울에서 온 연구원? 시전. 어시스턴트 연구원 S라고 자기소개를 해준 이이(아랍계 영국인, 남) 덕분에 인턴 F(흑인, 여)과 D(백인, 여)와도 자연스럽게 통성명. 이렇게 한참이 흘렀는데 보스가 안 옴. 오픈시간 15분이 넘도록 안 오는 보스한테 카톡을 보냈으나 묵묵부답. 스탭들 얘기를 들어보니 기본 30분은 늦어서 업장 밖에 대기한다고 함. 미친.
보스 1은 35분이나 지각했음에도 딱히 미안해하지 않고 다른 스탭도 별말 없음. 나만 개빡침. 난 거의 한 시간을 밖에서 기다린 셈이란 말임. 보스 2는 카톡 보낸 지 1시간 넘어서 미안 보스 1 갔지? 대충 분위기 파악하고 있으렴- 이지랄. 놀랍게도 업장은 그라운드층의 쇼룸만 정비된 상태이고 지하 쇼룸 및 위층 수장고는 유물과 집기들이 뒤섞여 대참사 현장과 다를 바가 없었음. 대체 이사를 어떤 업체가 하면 이런 대환장파티가 성사되는 거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황망. 일단은 인수인계 좀 받아보려고 G박사를 찾았더니 당분간 휴직이라는 거임. 매우매우 당황하여 보스 1에게 그럼 누가 런던 실무 책임자인데? 니가 그 역할 좀 해줄래? 뭐? 런던에 도착한지 만 하루도 안 되서 갓 출근한 나한테 뭐라고? 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라는 거. 하. 일단은 유물 분류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현재의 어시고 인턴이고 사실상 전문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음. 진짜로 독박 써야 하는 상황.
몸 쓸 일 없고 아카이브 구축만 하면 된다던 보스 2는 점심때쯤 나타나 밥 먹으러 가자고 해맑게 채근함. 미친. 너무 해맑아서 먼지 뒤집어쓰고 일하던 스스로가 황망했음. 일단 뭐라도 같이 먹어줘야 다시 내 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 동반 외출. 맛집으로 유명하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는 식당에서 아보카도 샐러드를 주문. 아보카도는 적고 참치가 엄청남. 이럴 거면 튜나 샐러드라고 해야지. 부르르 떨릴 정도로 짠 참치를 씹으며 런던에서의 간헐적 채식 계획이 첫날부터 사실상 무산됐음을 깨달음. 아.
출근 4시간 만에 온몸이 카페인 보충을 요구함. 업장 탕비실에는 각종 차와 네스프레소 머신이 구비돼 있지만 석회질로 유명한 런던 수돗물 탓인지 물탱크는 물론 전기 케틀이 마치 간유리처럼 석회질로 덮여 있었음. 선택적 결벽증 환자인 본인으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인지라 커피를 내려주겠다는 인턴 F의 다정한 권유를 애써 거절함. 덕분에 업장에서 커피 안 마시는 사람으로 각인됨. 그래서 업장을 탈출해 맞은편 %커피로 도피. 한국에서 엄청난 대기줄을 자랑하는 %커피는 실제로 본토인 교토에서는 널럴하게 주문이 가능했는데 런던도 다르지 않았음. 교토라떼(아이스라떼에 감미료 추가) 큰 거를 시키고 멍 때리는데 지금 바로 서울 집으로 튀근하고 싶었음.
그러나 런던 집으로 퇴근할 수밖에. 불금 저녁이라 그런지 우아한 메이페어도 곳곳이 핫플로 변해있었음. 인파를 헤치고 지친 몸을 끌며 5분가량의 퇴근길을 지나 옴. 하도 먼지를 뒤집어써 세탁기를 돌리고 목욕함. 아침에 남긴 우유를 좀 마시다가 인근의 막스랑스펜서네 가서 저녁거리를 좀 사냥해 옴.
아무래도 아보카도를 따로 사야 할 듯. 아보카도 샐러드라고 하고는 정작 아보카도는 거의 없음. 런던은 라임이 레몬처럼 저렴해서 잔뜩 사다 냉장고에 비치해 두면 이리저리 쓸모가 많음. 아보카도보다 쿠스쿠스과 그린빈이 더 많은 샐러드와 호밀빵, 그리고 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먹으며 내일이 주말인 것에 일단 감사. 하.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진·본문 불펌은 안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