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의 첫사랑, 파평윤 씨 둘째 딸

by 청명

봄빛이 내려앉은 저잣거리는 온통 생기로 가득했다. 장사꾼들의 고함, 아이들의 웃음, 구수한 전 냄새. 그곳은 궁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수양대군은 모처럼 호위 몇을 거느리고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대군마마, 이런 곳에 오래 계시면 곤란하옵니다.”
“내가 군이라 해도 백성의 숨결을 모르면 어찌 세상을 안다 하겠느냐.”

그때였다. 아이 하나가 발을 헛디뎌 바구니를 떨어뜨렸고, 산딸기가 바닥에 굴러 흩어졌다. 순식간에 소녀가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하얀 저고리, 곧은 눈빛.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단 한 사람만이 고요히 서 있었다.

“괜찮니?”
소녀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산딸기를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주변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양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놀람도, 두려움도 없는 당당한 눈빛이었다.

“……그대는,,,,?”
수양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파평윤가의 둘째이옵니다. 낯선 분이시군요. 어디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사옵니까?”

그녀의 시선에는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먼저 스쳤다. 눈앞의 사내가 고관의 자제일 거라 짐작은 했지만, 그것이 곧 위압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수양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비단결 복식은 등불에 은은히 반사되어 그가 궁궐의 사람이란 걸 말해주고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잠시 세상 구경을 나온 나그네요.”

그녀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그네라…. 고운 옷을 걸친 나그네시군요.”
농담조의 말이었으나, 말투는 단단하고 여유로웠다.

“양가 규수가 이런 곳에 오는 것은 흔치 않소.”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윤 씨는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또렷하고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굳은 심지가 있는 듯.
“담장 안에서만 세상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저는 백성이 사는 곳을 보고, 그들의 숨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것이 진짜 세상이니까요.”

수양은 순간, 뜻밖의 답변에 멈칫했다. 대부분의 규수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의 소녀는 여느 규수와 달랐다. 궁궐 담장 안에 가두기엔 아까운, 세상을 똑바로 마주 보는 사람이었다. 그 단단한 눈빛이 그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며칠이 흘렀다.

수양대군은 조정에 앉아 있었으나, 마음은 번번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대신들이 입을 열고 정사를 논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책의 글자들은 하나같이 흐릿했고, 무언가가 머릿속 깊은 곳을 가만히 흔들고 있었다.

파평 윤가의 둘째. 담장 안이 아니라 세상을 보고 싶다고 했지.
눈빛이… 참 또렷했었지.

그는 처음으로, 아무 이유도 명분도 없이 정사를 미뤘다. 그리고 호위 둘만 데리고 몰래 저잣거리로 향했다. 발걸음이 어쩐지 가볍고 빨랐다. 이건 분명 ‘우연’이 아니었다.

저잣거리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오늘은 봄바람이 조금 더 부드럽게 불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지나 장터 끝으로 시선을 옮기자—그녀가 있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소박한 모습이 더 눈에 띄었다. 윤 씨는 상인의 물건 나르는 일을 거들고 있었다. 돌덩이를 옮기는 사내 옆에서 땀을 닦으며 장정들과 똑같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규수 양반이 저걸 다 들어?”
“매일 저러네. 고운 얼굴에 기운도 장사야.”
상인들의 농담 섞인 말소리가 흘러왔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웃으며 흙 묻은 손을 털고, 쓰러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무거운 광주리를 대신 들어주었다.

수양은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예쁘다는 감정이 아니었다.
말했던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 담장 안의 안온함 대신 세상의 먼지를 선택한 여인.

그녀가 등을 돌리고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그 순간—수양은 가슴 한쪽이 묘하게 저릿해짐을 느꼈다.
한 번 더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춰 섰다.

이건… 무언가 다르다.
그저 호기심도, 잠시 스친 인연도 아니다.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시종이 다급히 속삭였다.
“대군마마, 너무 오래 계시면 위험하옵니다.”
“……잠시만 더.”

그는 눈을 떼지 못했다. 여인의 웃음, 강단 있는 움직임, 단단한 뒷모습이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 선명히 각인되고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 마음이 곧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겠지.

수양은 스스로도 낯선 감정에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권력도, 명분도 없는 자리에서 오롯이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시간. 그것이 처음이었다

밤이 내려앉은 정원, 대군의 행차는 소리 없이 파평 윤 씨 집 앞에 멈춰 섰다. 수양은 단단히 결심한 얼굴로 마당을 걸어 들어섰다. 등불 아래, 소녀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불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고요히 담기고,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이런 늦은 시각에… 대체 누구시길래—”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을 멈췄다. 정중한 옷차림, 호위의 위엄, 그리고 눈빛. 그제야 그녀는 눈앞의 사내가 단순한 행인이나 관리가 아닌, 대군 수양임을 깨달았다.

“그대는…”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수양이 천천히 다가섰다. “내 신분을 숨긴 건, 그대를 시험하려 함이 아니오. 처음 본 날부터… 자꾸만 그대가 떠올라 도무지 조정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소.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밤의 등불이 비춘 수양의 얼굴에는 왕좌의 무게가 아닌, 한 남자의 결심이 담겨 있었다.

“저는 궁궐에 묶여 사는 여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담장 밖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싶습니다.”

“그대의 길을 막지 않겠소. 나와 함께한다 해도, 세상은 그대의 것이 될 것이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멀리서 풍악이 은은히 들리고, 봄밤의 꽃잎이 흩날렸다. 정희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제 길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맹세하오.” 수양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 뜻을 굽히지 않는 조건으로… 혼인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달빛 아래 마주 선 두 사람. 수양은 처음으로 권세도 신분도 아닌, 한 남자로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날 밤, 대군 수양과 파평 윤씨 정희의 인연은 그렇게 운명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