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리를 찾아서 Oct 03. 2023

국방색 솜동복

1996년 내가 5살 쯤 일이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까지 여섯 식구가 한집에 살고 있었다. 

바닷가에 살고 있었던 터라 남자들은 어업을 주로 하였고 어머니는 근처 시장(장마당)에서 공업품 판매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의 하루 일가는 아침에 남자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수습하고 점심 식사 후 시장에 나갔었다. 

여름에야 상관없지만 북한의 겨울은 상상 이상으로 춥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국방색 군인 동복을 입었다. 시장에서 군인 동복을 입은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날도 5살의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체 혼자 노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안고 마당 구석에 위치한 창고로 들어갔다. 이미 창고에서는 어머니가 작은 군인 배낭에 짐을 들춰메고 있었다. 

입고 있는 동복 안에는 색을 알수 없는 코트를 더 입고 있었다. 분명히 멀리 가는 외출복이었다. 

나는 애기때부터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울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도 엄마가 잠깐 어디 다녀오는 줄 알고 있었다. 

엄마가 코트 위에 시장 동복을 입은 이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알아 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엄마는 나를 안고 오랫동안 뽀뽀를 한 후 떠났고 나는 아빠 품에 안겨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그날 저녁이나 다음날이면 당연히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겠지. 

어머니가 떠나간지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쯤 그리움에 사진첩을 하루가 멀다하게 들여다 보곤 했다. 

매일 시장에 나가 어머니를 찾아 다녔다.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무작정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며 손을 잡았다. 그래서 그 시장에서는 다들 나를 알고 있었다. 

‘엄마 없는 애’, ‘엄마가 집 나간 애’, ‘엄마가 버리고 간 애’ 

그렇게 라도 기억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어머니 얼굴이 있는 사진은 전부 불태웠다. 

그렇게 라도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건 국민증(주민등록증) 속의 작은 엄마 얼굴과 국방색 솜동복을 입고 총총 걸음으로 가던 뒷모습 뿐…


그럼에도 엄마가 나를 보러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엄마가 이 글을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나를 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했을까?

이 세상에 아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랬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사 그것이 ‘죄’라고 하더라도 15년이라는 세월을 아들을 향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 왔을 당신은 이미 그 죗값을 다 치뤘다. 

다만. 아들도 15년이라는 시간을 그리움 하나로 버티고 살아 왔을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작가의 이전글 북한에서 학생회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