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인 인공지능
몇 해 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었습니다. 그 책을 통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핵심은 단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상징과 언어’, ‘집단적 상상력’, ‘기록과 도구’라는 복합적인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라리는 인간이 ‘허구를 믿고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국가는 실체가 없지만 모두가 믿기에 작동하고, 종교·법·돈·예술 역시 허구이지만, 인류는 그것을 공유하며 협력하고 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인간은 상징을 창조하고, 집단적 허구를 상상하며, 도구를 발전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도구를 통해 예술과 철학, 윤리와 문화라는 고차원의 세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AI를 활용해 문자와 이미지로 창작하고, 그 허구의 세계를 온라인에서 집단적으로 상상하며 소통하는 모습은, 어쩌면 인류가 가진 가장 인간적인 특성의 연장선상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AI(인공지능)의 출발점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결정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특정 작업의 효율과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 본질은 인간을 대체하거나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의 확대’입니다. 반복 업무의 자동화, 정보의 빠른 분석, 문제 해결의 효율성 제고는 모두 인간의 부담을 줄이고, 더 창의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작의 영역에서 AI를 활용하는 행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존이 아니라, 사고의 속도를 높이고 사유의 폭을 확장하며, 작업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입니다. 주체적인 사용자는 AI를 통해 능동적으로 사고를 보완하고, 더 탄탄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주체가 됩니다.
정서적인 문학 작품과 논리 중심의 논설문이 AI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장르마다 지닌 감성, 구조, 문체가 다르기 때문에, AI의 개입 범위와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하고 사고가 빠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예외는 존재하지만, 다양한 분야를 빠르게 습득해 자신만의 영역으로 통합하는 사람들은 대개 언어적 표현력과 구조화 능력이 뛰어납니다. 의사나 변호사 출신 작가들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들은 예술적 감각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다른 예술 영역을 깊이 파고들 기회가 적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장비나 물리적 비용이 적게 드는 글이라는 매체에서는, 사고의 명료성과 감각의 예민함이 강점으로 드러나며,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곧, 글쓰기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유와 감수성, 통찰력을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창작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모든 글이 “명확하게 직조된 언어 예술”의 수준에 도달하지는 않더라도, 글은 그 사람의 내면과 태도, 지적 역량을 투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런 맥락에서 ‘글 잘 쓰는 미술인’이라는 표현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작업노트나 창작 의도를 설명하는 데에는 AI를 활용하면서, 정작 작업 그 자체에는 AI 기술을 도입하는 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글쓰기를 여전히 부차적이고 부속적인 작업으로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뛰어난 미술적 통찰은 글에서도 자연스럽게 배어나오기 마련이며, 이 둘을 별개로 구분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글 잘 쓰는 미술인’보다는, 작업의 깊이가 작업노트와 글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미술인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창작에 공을 들이고, 그만큼의 보상을 바라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즉각적이거나 정비례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의 크기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쌓아 올린 사유와 감정, 집중의 깊이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진정성 있는 창작은 여전히 인간만이 감당할 수 있는 밀도와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도구를 다루는 존재’로서의 인간다움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