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2 2025년 6월 21일, 토요일
(GMT+2)파리 시간
"내가 쓴 이 글 안에 혹시 편협한 시선이나 자기 확신의 과잉은 없었는가?"라는 당신의 질문에 대해, 각 문단에서 의도치 않게 단정적일 수 있는 부분들, 또는 다른 시각의 가능성을 짚으며 비판적 반문을 해보겠습니다. 원문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아래에 반문을 달겠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서류작업을 몰두하다가 그대로 기절했다. 올해 상반기, 통신사 기지국의 정책변경으로 낮시간에 집에서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해지면서, 밤낮의 개념이 사라졌다. 게다가 전기가 끊기면서 매일같이 밖에서 활동하며 라면만 끓여먹던 것이 6개월이 지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냉장고가 고장났는데, 고장난 냉장고를 고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아 냉장보관해야하는 음식을 먹는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풍성했던 머리숱이 어느새 많이 줄었다.
� 반문:
— 혹시 이 기록은 너무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을까?
— 반복되는 '할 수 없었다'는 구조가 나를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나?
—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극복하려는 다른 가능성은 정말 전혀 없었던 걸까?
— 혹은, 나는 이 상태를 기록하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더 악화된 인상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친구 집으로 이사한 이후 여러모로 생활은 편해졌지만, 6개월 동안 굳어진 습관이라는 게 쉽게 고쳐지는 건 아니었다. 밖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단백질 섭취를 소홀히 하면, 언젠가 나도 모르게 몸이 아파와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지출은 늘어났고, 그게 점점 부담이 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 반문:
—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은 나의 책임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 단백질 부족으로 무너진다고 느끼는 건 실제 의학적 사실인가, 아니면 불안과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심리적 공포인가?
— 지출이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대안들'은 정말 없었을까?
무튼 해야 할 많은 일들 중 서류 관련한 것들은 어느 정도 진행을 시작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차근차근 해결해보려 하면, 마치 시험이라도 치르듯 전혀 다른 곳에서 감정적인 공격이 들어오고,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 반문:
— ‘감정적인 공격’이라 말하는 그것은 혹시 내가 과도하게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문제를 해결하려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는 구조는 삶의 피로를 정당화하려는 내적 방어기제는 아닐까?
— 그런 공격이 ‘외부에서 오는 것’만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전쟁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을 삶 안에서 문제처럼 만들어내고, ‘안정’보다 더 안정된 상태, ‘안락함’보다 더 안락한 상태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걸까?
� 반문:
— 모든 인간이 그런가? 그 본성은 누구의 관찰에 기반한 것인가?
— 어떤 이들은 더 안락한 상태를 탐하지 않고도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 그 탐욕처럼 보이는 욕망이 정말 잘못된 것인가, 혹은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동력인가?
그렇게 안락함과 안정감을 위해, 이치라던가 통념적인 것들에 둘러쌓인 감당을, 그러니까 해내지 못한다면 하지 못한다면 "인간실격"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히도록 만드는 전쟁 속에서 모두가 서로를 증오하고 질투한다.
나 하나 살아내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살기 위해, 나는 악해지고, 또 악해진다.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는 않아서다.
파리에서 6월 21일은 Fête de la Musique (페트 드 라 뮈지크), 즉 세계 음악 축제가 열리는 날로, 도시 전체가 음악으로 들썩이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바깥에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이 갑갑함을 음악으로 장식하는 것은 어쨌든 죽을 위기는 아니니, 즐기라는 어떤 메세지처럼 다가온다. 전 도시가 무대가 되는 날, 장르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이 날, 정작 뮤지션인 나는 그 어떤것도 기획하지 못한 채 서류를 붙들고 있다.
� 반문:
— 음악이 들리는 이 순간, 나는 정말 '참여하지 못했다'고 단정해도 되는 걸까?
— ‘계획된 기획’만이 참여인가? 듣고 반응하는 것도 하나의 존재 방식 아닐까?
— 혹시 이 문장은 '내가 무언가를 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정당화하는 구조로 쓰이고 있진 않은가?
하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만으로, 그리고 이곳이 파리라는 사실만으로, 잠시 모든 것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