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선물

by 도도히



여고 때의 일이다. 생일선물이라며 언니가 첫 월급으로 손목시계를 사주었다. 알람도 울리고 시간도 체크할 수 있는 최신형 시계였다. 가난한 살림에 언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대식구를 감당하기가 빠듯했기 때문이다. 언니는 장녀로서 부모님 대신 오남매나 되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그 시절 우리 형제들은 생일이 되어도 선물을 받거나 케익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그저 아침에 미역국이 나오면 누구 생일이거니 짐작하며 마음으로 생일을 축하하며 감지덕지 아침 식사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도시로 나와 언니와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일 선물은커녕 미역국마저도 챙겨 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간혹 언니는 야근을 하고 이튿날도 새벽에 출근을 해야 했다. 나 역시 야자를 하고 밤늦게 귀가를 했다. 아침이면 비몽사몽간에 허둥지둥 헤매곤 했다. 그날은 언니가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상을 차려놓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날따라 밥상 위엔 작은 선물상자와 메모가 있었다.


“생일 축하해. 이제 아침에 깨워주지 않아도 되겠네. 진작 시계가 있었어야 하는데, 그간 많이 불편했지? ……맘에 들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해. 파이팅!”


미역국을 끓여놓고 선물상자에 엽서까지 놓여 있었다. 은빛 바탕에 금빛으로 에펠탑이 그려진 손목시계였다. 게다가 시곗줄이 내가 좋아하는 프렌치 블루였다. 유니크하고 앙증맞았다. 내 생애 첫 선물이었다. 언니는 저도 없는 시계를 동생에게 사준 것이다. 너무 마음에 들었고 가슴이 찡했다. 평생 잊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정말 감동적이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 시계를 차고 내가 못한 공부까지 해 줘’라는 언니의 꿈과 무언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 시계가 더욱 귀하게 느껴졌고 많이 아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시계를 언니의 애칭을 붙여서 써니라고 불렀다. 그렇게 써니는 내 여고시절 최고의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써니는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함께 붙어 다녔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해 나를 도와주었다. 알람기능에 몇 가지 음원이 들어 있었고 방향과 시각을 잴 수 있는 스마트한 최신형 제품이었다. 간혹 음악을 듣거나 여러 가지 과목을 시간표에 맞춰 학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매일 야간 학습으로 지친 나를 아름다운 선율로 부드럽게 깨워주었다. 바쁜 등하교길 째깍째깍 종종거리며 함께 동행 했다. 늦은 밤길 으슥한 골목길을 걸을 때는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써니야, 지금 몇 시니? 여기는 어디야? 나 잘 하고 있는 거니?”

그러면 써니는 바로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며 시간을 알려 주고 환하게 빛을 내며 길을 밝혀 주었다.

“오늘은 몇 일이니? 요일은?”

아무도 없는 길을 말을 건네며 모종의 두려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때마다 가로등도 없는 길을 반짝반짝 깜빡이던 바늘은 내게 빛이 되어 주고 위로가 되었다. 써니와 나는 그렇게 정이 들었고 손목에 써니가 있는 한 언제나 자신감이 충만했고 든든했다.


그런데 어느 날 써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날 아침에 알람이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간신히 지각은 면했지만 아무리 찾아도 써니는 보이지 않았다. 전날 밤 분명히 씻는다고 풀어놓은 것 같은데 없었다. 귀가 길에 시곗줄이 풀어져 어딘가에 떨어져 나간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디에 흘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몇날 며칠을 써니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잠을 설치며 써니 생각에 빠져 지냈다. 극도로 허전하고 우울했다. 그러던 중 비몽사몽간에 꿈을 꾸었다. 푸른 시곗줄이 달린 써니였다. 생시처럼 써니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무슨 말인가를 전해왔다.


“더 이상 나를 생각하지 마. 무엇이나 만나면 헤어지는 거야. 나 때문에 네가 시간을 허비하면 내가 더 슬퍼져. 그만 네 일에 집중하고 입시공부에 집중해.” 써니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 그런 써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꿈속에서 써니는 나를 염려해 주었다.


잠에서 깬 후 난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일단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빨리 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언제까지나 써니 생각만 할 수도 없었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써니나 나를 위해서 최선이고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만이 피해를 가장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깊은 상실감과 허전함을 애써 떨쳐냈다. 분신 같은 친구를 잃어버린 것만도 억울한데 더 이상 시간이나 마음까지 빼앗기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써니는 내게 귀한 깨달음을 남긴 채 잊혀져갔다.



서울역에서 만난 어머니는 차멀미로 혈색이 하얬다. 차멀미를 심하게 한 탓이다. 찬바람에 정신이 들었는지 어머니는 허리를 펴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길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손주 돌잔치에 오시느라 몇 년 만에 기차를 탄 것이다.


“오랜만에 기차를 탔더니 멀미가 심하더구나. 확실히 나이는 못 속이겠다. 오는 내내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지. 얼마나 속이 메슥거리던지 꼭 입덧을 하는 것 같았다. 바깥바람을 쐬니 이제야 살겠다.”


어머니 표정이 조금 살아나는 듯 했다. 오랜만에 염색을 한 탓인지 한결 젊어 보이기까지 했다. 조금 전까지 차멀미로 진을 뺀 노인 같지 않았다. 여전히 고운 모습이었다. 손주 녀석 돌이라고 염색에 펌까지 하고 치장을 한 때문이었을까. 요즘은 나이 칠십이라도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 지금처럼 염색도 하고 펌을 하고 다니세요. 헤어스타일만 조금 달라졌는데 꼭 새색시 같아요. 한 이십 년은 더 젊어 보이네요. 하하”

남편은 너스레를 떨며 어머니의 짐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만,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사람이 아무러면 어떠냐. 크게 아픈 데 없이 사는 것만으로 고맙지.”

“누구에게 보이려고 한다기보다는 다 자기만족이지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멋도 좀 부리시고 이젠 텃밭 가꾸기도 좀 줄이셔요.”


말이 텃밭농사지 사실 초로의 나이에 혼자 힘으로 그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큰 농사였다. 길가 빈 공터까지 어머니는 놀리는 땅이 아깝다며 쉴 새 없이 뭔가를 심고 가꾸었다. 그러다보니 한가하게 동네 마실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그 덕에 우리 집 냉장고에는 고구마, 옥수수 등 사시사철 간식거리가 넘쳐났다.


“그런데 웬 짐이 이렇게 많아요. 그냥 몸만 오시래두요.”


남편은 미간을 찌푸리며 올망졸망 짐 보따리를 주워들고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오늘따라 이것저것 들 것이 많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고들배기 김치며 검은 콩, 참깨 등을 챙겨 오셨다. 아무 것도 필요 없다고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해도 어머니에게는 공염불이었다. 사실 아파트 10분 거리에 전통시장이 있고 부족한 것이 없었다. 시골 장이나 진배없이 모든 농산물이 산더미 같이 쌓였다고 역정을 내다시피 전화통화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역시 통하지 않았다. 나이 삼십에 홀로 되신 어머니는 이런 억척으로 남매를 키우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텃밭을 가꾸며 고향에 혼자 계신다. 서울에 올라와 같이 살자 해도 극구 손사래를 쳤다.


“아파트 생활은 갑갑해서 내는 살 수 없다. 그리고 아는 이도 없고 꼭 감옥살이 같다. 텃밭에 나가 고추농사며 이것저것 푸순가리 가꾸는 재미가 사는 맛이지 심심풀이도 되고…… ”


어머니는 작년에 칠순잔치를 했다. 어머니 친 자매와 동네 친구들을 모시고 마을 회관에서 돼지를 잡았다. 어머니 칠순을 앞두고 3년 동안 꼬박 적금을 들어 놓은 덕에 계획대로 잔치를 치룰 수 있었다.


생신 선물로 금팔찌를 해드렸다. 금값이 만만치 않았으나 평생을 자식만 바라보고 살아오신 어머니께 아까울 것이 없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주저 없이 순금 한 냥짜리 팔찌와 동남아 여행까지 보내 드렸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허드레 일하는 사람이 금팔찌를 하고 다니면 욕먹는다면서도 내심 좋아하셨다. 평소에는 아끼느라 차고 다니지 않았다. 장롱 깊이 패물함에 넣어둔 채 가끔 꺼내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아들 집에 오면서 한껏 멋을 내고 팔찌까지 차고 길을 나선 것이다. 그러나 서울역에 내려서도 팔찌가 사라진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집에 와서야 손목이 허전한 것을 느꼈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곰곰 되짚어보니 기차 안에서 멀미를 심하게 했던 생각이 났다.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고, 별 생각 없이 종착역에 내려서 짐 보따리를 챙기느라 미처 팔찌 생각을 못한 것이다. 기차 안에서 잠이 든 사이 어떻게 된 것일까…….


평소에 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팔찌를 잃다니. 별 말씀이 없어도 어머니는 상심이 큰 눈치였다. 밤새도록 이 몽 저 몽 한잠도 못 주무신다. 끼니도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도통 입맛을 잃으셨다. 곱던 얼굴이 며칠 새 반쪽이 되었다.


“어머니, 그깟 것 더는 마음 쓰지 마세요. 담에 더 좋은 걸로 해드릴 게요”

남편은 아침마다 출근길에 어머니 기분을 살피고 마음을 다독거리며 집을 나설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루빨리 어머니가 기운을 차리실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불현듯 여고시절 잃어버린 시계가 떠올랐다. 오랜 세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어머니도 그때의 나처럼 허전함과 상실감으로 몇 날 며칠을 앓고 계신 것이다. 어쨌든 팔찌를 잃고 상심하고 있는 어머니께 써니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머니 눈빛에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눈빛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어머니, 팔찌를 잃어버린 것만도 속상한데 우리 더 이상 다른 것까지 잃지는 말아요. 팔찌보다 소중한 것이 어머님 건강이에요. 무엇보다 그것이 우리 가족의 행복이랍니다. 아범도 어머니 걱정에…… 그러니 더 이상 상심하지 마셔요”


“너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 네 말을 들으니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젠 억지로라도 그 팔찌 생각을 지워야겠다. 그만 잊으려 해도 쉽지 않더구나. 하지만 이젠 정말 마음을 털고 그만 잊어야겠다. 팔찌를 잃은 것만도 억울한데 더 이상 다른 것들을 잃지는 말자. 너희도 더는 맘 쓰지 말거라.”


어머니는 오랜만에 바깥나들이도 하시고 눈에 띄게 기운을 차리셨다. 오랜만에 써니가 그리웠다. 그리고 새삼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재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쿨하게 잊기로 생각하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금시 평온을 되찾았다. 가난도 재산이라더니 오히려 잃어버린 것들이 있어서 감사한 날이었다.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 이십대는 이십의 속도로 가고, 삼십대는 삼십의 속도로 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빠르게 휙휙 계절이 바뀐다. 특히 맞벌이 부부의 일상은 상대적으로 빠르다. 직장생활에, 가사에, 육아에 1인 다역을 하다 보니, 늘 쫓기듯이 살아간다. 딱히 도움을 받을 곳 없이 가족을 돌보며 살아야 하는 직장 여성의 일상은 사뭇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눈을 떠 조식 준비와 출근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촌각을 다투며 살다보니 통장 개수가 늘고 계획대로 삶의 터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덕에 결혼 10년차에 우리는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큰 변수가 없는 한, 계획대로 대출금도 갚고 생활이 금방 안정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가는 곳이 많아지고 액수도 커지기 시작했다.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 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남편의 월급이 며칠씩 미뤄졌다. 다른 회사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보너스마저 들쑥날쑥 했다. 게다가 대출 이자는 연일 고공행진이었다. 그간 빠듯하던 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남편이 하루는 동료를 비난하는 말을 했다.


“그렇잖아도 회사가 어려운데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챙겨서 나가다니……”

남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월급날도 늦어지고 보너스 조차 안 들어오니 집에서 그만 두라 했나보네.”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회사가 어려울수록 힘을 보탤 생각을 해야지, 그것도 회사의 중책을 맡고 있는 간부라는 자가 퇴직금을 챙겨 나가다니,……비겁해. 양식 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회사가 정말 어렵긴 어려운가 보다. 남편의 말대로 어려울수록 모두가 하나 되어 온 힘을 합친다면 쓰러질 회사일망정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직을 맡고 있던 간부가 밀린 급여와 퇴직금을 챙겨서 떠나다니 단단히 섭섭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짓은 안하겠다는 거다. 들어보니 남편 말이 다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당장 돈은 못 가져 와도 사람은 제대로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남편이 존경스러웠고 한편 고마웠다. 그 후로 월급이 늦어도 느긋하게 기다리고, 보너스를 못 가져와도 이해하며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을 하니 큰애가 놀란 눈으로 팔을 잡아끌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아까 어떤 낯선 사람들이 문을 막 두드리고 들어와 이런 것을 붙여 놓고 갔어요. 얼른 와서 보세요”


낯선 남자 둘이 집에 들어와 냉장고에 ‘무슨 딱지’를 붙이고 갔다는 것이다. 수원 검찰청 도장이 찍힌 ‘가압류 딱지’였다. 거기에 적힌 품목에 대해서는 단 하나라도 함부로 은닉하거나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쪽지에는 모든 가구와 가전제품 품목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남편이 연대보증을 선 것이 잘못되었다. 보증을 서 달랜 당사자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남편이 몽땅 뒤집어 쓴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그동안 간당간당 버텨오던 회사가 끝내 회생불능으로 파산신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수출과 내수부진, 고금리와 고물가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요 간부였던 남편도 부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남편이름으로 된 집마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때서야 얼마 전 누군가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챙겨 나갔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이런 사태가 올 것을 미리 알아챘던 것이다. 더 이상 회사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그래서 미리 손을 쓰고 사표를 냈던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그대로 직격탄을 맞았다. 기가 막혔다.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다니.

그 순간은 손목시계나 팔찌를 잃고 최소한의 피해 운운하던 다짐도 소용이 없었다. 그냥 머릿속이 하얬다. 가족이 거주할 생활터전을 몽땅 잃어버린 것이다. 참담했고 망연자실했다. 아무 것도 없이 집밖으로 나앉게 생겼다. 어린 것들을 데리고 살 일이 아득했다. 어떤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말없이 고개 숙인 그가 원망스럽고 너무나 미웠다. 그래서 매일 큰 소리를 치며 화를 내고 싸웠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이었다. 어린 아들이 문자를 보내왔다. 일곱 살짜리가 처음 써 보낸 문자였다. 아직 글자를 완전하게 익히지 못해서 맞춤법이 온통 어긋나 있었다.


“엄마, 이제 곳 크리쓰마쓰가 옴니다. 이번에는 함방눈이 펑펑 내려쓰면 조케써요.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 사이조케 눈싸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며 살고시퍼요. 그러케 신나고 행복하게 살아쓰면 조케써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엄마 아빠가 매일 큰 소리 치며 싸우는 동안 아이들 생각은 뒷전이었다. 아이들은 매일 쥐 죽은 듯 불안에 떨며 집안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 모든 것을 잃었지만 마지막 우리 아이들의 행복까지 빼앗기지는 말자. 소중한 것은 그깟 물질이 아니야. 가족의 행복이지. 온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어. 그래, 마지막 가장 귀한 것만은 잃지 말자. 처음 시작할 때처럼 다시 일어서는 거야……’

어디선가 써니가 째깍째깍 박수를 치며 응원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화해의 말들이 스쳐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이 다짐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가능한 빨리 잊자. 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순리대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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