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를 읽고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문학사상, 2021)

by 도도히


오늘도,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설의 첫문장이다. 그렇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 선택할 수 없다. 최악의 시대, 극도로 거친 환경에서 태어난다 해도 할 수 없다. 복불복(福不福)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시작하는 것. 결과 값은 아무도 모른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갈 뿐이다.


서평을 쓰려고 생각하니, "인생은 파친코, 그래도 상관 없다."로 읽힌다. 영진과 선자, 그리고 모자수와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삶이 다 그렇다고 생각되었다. 삶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것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일제강점기, 1910년대 부산 영도에서 시작해서 오사카로 이주해 1989년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디아스포라의 삶이 파란만장하다. 이야기는 가난한 집 막내딸 영진이 ‘언청이에 절름발이’ 훈이와 결혼하고, 딸 선자를 낳으며 시작된다. 훈이는 정상인으로 태어난 딸을 애틋하게 사랑하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고, 영진은 하숙을 치며 홀로 선자를 키운다.


선자는 열여섯무렵, 부모 나잇벌인 한수의 아이를 갖게 된다. 한수가 결혼해서 아내와 딸이 있는 줄 몰랐던 선자가 결혼하기를 바라자, 한수는 유부남임을 밝히며 선자를 돌보아 줄 수는 있어도 결혼할 수는 없다고 한다. 선자는 그의 첩으로 사느니 스스로 사는 길을 택한다.


그 무렵 폐병을 앓는 하숙인 이삭을 돌보게 되고.... 죽을 고비를 넘긴 젊은 목사 이삭은 선자의 사정을 알고 그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키우겠다고 한다. 선자는 이삭과 혼인해서 오사카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한수의 핏줄 노아와 이삭의 아들 모자수를 낳는다.


그러나 낯선 타국 이민자의 삶은 혹독했다. 특히 냉대 받는 조선인으로 견디기에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선자는 김치와 설탕과자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신사참배 문제로 이삭이 옥고를 치루고 병든 몸으로 풀려난 뒤 곧 세상을 떠난다.


이민자의 정체성과 작품 동기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작가는 일상에서 국외자들의 정체성 문제를 깊이 체감한다. 예일대 재학 시절, 강의를 들다가 일본에 살던 한 중학생이 한국 혈통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작가는 충격을 받고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소설을 쓰게 된 모티브다.


한 인터뷰에서 “책명을 파친코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작가는 “우리의 인생이 파친코와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파친코’는 조선인들이 주로 종사했던 일본의 도박 산업이다. 조선인들은 이민자 차별로 인기 있는 대기업에 취직할 수 없었다. 비교적 쉽게 일할 수 있는 곳이 파친코였다. 이민자들은 생계를 위해 자연스레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부모들은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견디면서 자식들만은 좀 더 나은 환경 속에서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던 그들은 막연히 어떤 우연을 바라고, 운명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들에게 파친코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주문을 걸 수 있는 좋은 대상이 된다. 예측할 수 없는 행운과 , 인생 한방을 꿈꾸게 하는 달콤한 미끼인 것이다. 그런면에서 인생은 파친코 같다고 할 수 있을까나.


이 책 1권의 타이틀이 ‘고향’이고, 2권은 ‘조국’이다. 작가가 이민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본토에서 태어나면 자국민으로 인정해주고 시민권을 줄 수는 없을까.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는 공정한 국제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1952년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들은 열네 살 생일에 외국인 등록 거주증을 받아야 한다. 그 후에는 3년마다 등록증을 갱신해야 했다. 몇 대에 걸쳐 살아오고 그곳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성장해도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체류자로 추방당한다. 이들에겐 조국도, 고향도 없다.


적자생존, 영원한 진리

작품 속 인물들은 만화경처럼 수많은 군상이 출몰한다. 그러나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보면 크게 두 부류다. 적응하며 살아남느냐, 무너지느냐.


이삭은 사랑과 희생의 아이콘이다. 곧고 반듯한 목회자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무너졌다. 순수한 신념으로 종교적인 양심을 배반하지 않았기에 버티지 못했다.


노아는 학벌과 재능이 있는 우수한 인재였다. 착하고 온순한 성품으로 반듯하게 살고 싶어했다. 당시 조선인들의 이미지는 화가 많은 저속하고 더러운 조선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했다. 더구나 친부가 야쿠자라는 사실을 알고선 절망한다. 자기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건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택한 그 모습은 독자에게 큰 충격을 준다.


반면, 모자수는 험난한 사회에서 밀리지 않고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다. 학교에서 몇 번의 폭력성을 보이지만, 먼저 시비를 걸거나 친구를 괴롭힌 적은 없다. 더러운 조선인이라고 먼저 욕을 하고 괴롭히는 친구들을 참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고? 모자수는 아이들이 자신을 멍청하다거나, 폭력적이라해도 상관없었다. 필요하면 그 애들의 이를 몽땅 뽑아 버릴 수도 있었다. ‘내가 짐승이라고 생각한다면 짐승이 되어 모조리 다 물어 뜯어 주겠어’라고 생각했다. 모자수는 착한 조선인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학교 선생이 형 노아에게 ‘훌륭한 조선인’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듣고, 자기는 형처럼 착한 조선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 아이들이 부당하게 놀리거나 건들 때는 먼저 주먹질을 해서 다시는 그들이 자기를 건들지 못하게 했다.


더 이상 공부할 생각도 없었다. 몇 번 폭력으로 주의를 받게 되자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파친코’ 구인광고를 보고 입사한다. 그의 목표는 돈을 모아서 제 사업장을 갖는 일이었다. 그렇게 파친코 사업으로 성공한 모자수는 아들 솔로몬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솔로몬은 처음엔 아버지의 소원대로 외국계 금융은행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 일본인 선배에게 이용당한 후 길을 선회한다. 남들이 뭐라 해도 아버지야말로 정직하고 반듯한 사업가라고 믿었다. 결국 외국기업에 다닐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간다.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힘센 강자로 살아가는 한수의 말을 들어보자. 일찍이 일본 야쿠자의 사위로 들어가 사업가로 성공한다. 고향을 찾아 북한으로 떠나는 김창호에게 그가 털어놓는 삶의 방식이다.


“나는 좋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야. 돈을 잘 버는 사람이지. 모든 사람이 사무라이 정신이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믿는다면 이 나라는 산산조각이 날걸. 천황은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아... 공산주의자들은 널 돌봐주지 않아.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지. 그들이 조선을 생각한다고 믿는다면 넌 정신이 나간거야.”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느냐, 죽느냐는 각자의 적응방식에 달려있다. 불가항력인 운명이라면 체념하는 것도 순리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낮은 자세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영진과 선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 뒤를 이어가는 모자수와 솔로몬의 길처럼.


일본 정부와 인기있는 회사들은 조선인을 고용하지 않았다. 교육받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자연스럽게 파친코로 흘러들 수밖에 없었다.


솔로몬은 누가 모자수를 욕을 하고 비난해도 아버지의 정직함과 노고를 알기에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아버지야말로 세금을 제대로 내며 합리적으로 사업을 운영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 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모자수의 말이다. 이것이 이민자의 현실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사람들. 그런 상황이 부모나 자기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계속된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다시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런 환경에서,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는가. 절박한 상황에서 자문하는 말이다. 자기가 처한 환경이 열등할수록 생각한다. 답이 없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현실을 어쩌겠는가. 조상을, 부모를 원망한들 소용이 없다. 그들도 그랬을 테니까...


인생은 그렇게 출발점부터가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존재라도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서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동물이다. 내가 하필 민들레꽃인가, 아니 꽃도 아닌 잡초인가 따진들 무용하다. 목련이나, 장미인들 다를 바 없다. 발길에 짓밟히는 질경이도 나름 아름답고 소중하다. 제각기 존재 이유가 있고 해야할 구실이 있다.


어느 시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든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자체만으로도 신기하고 존귀하다.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을 때 의미와 가치는 더욱 커지고 빛난다.


역사가, 태생이, 꼬이고 망한 것일지언정 나와는 상관없다라는 생각으로 시작 한다.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며 순수와 완벽에 집착할 때 인간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청정수에서는 생물이 살 수 없듯이.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을 지키며 어우렁더우렁 섞이며 함께 흘러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노아와 한수의 삶은 좋은 대비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극단에 치우쳐 있다. 노아가 순백하기를 원했다면 한수는 오물 속에서도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존재다.


작가의 시선은 두 유형을 대비시키면서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 머문다. 그것이 훈이와 영진의 삶이었고, 선자의 길이었으며, 모자수와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어디서 무엇이 된들 그것이 무엇인가. 나의 길을 갈 뿐이다. 그렇게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며 억겁 계절이 바뀌는 것이다.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가려면

얼마 전 안산역 근처에 갈일이 있었다. 2월 밤바람은 차갑고 낯설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자니 유난히 많은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다. 이태원하고는 또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그들의 나라에 내가 이방인이 되어 끼인 느낌이었을까. 그들은 주저함이 없었고, 당당하고 활기가 넘쳤다. 다행인 건가.


우리나라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생산가능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다. 특히 3D 업종(힘들고·더럽고·위험한 일)은 내국인 기피 현상이 심해 외국인 노동력 의존도가 높아지고. 선진국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외국인 노동력을 필요해서 받아들였지만, 함께 사는 준비는 아직 부족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차이로 인한 주민과의 마찰과 고용체불 현상 등의 문제도 흔히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다 합법적인 체류·고용 시스템이 개선되어야하고, 저들에게 언어와 문화 교육을 확대하고 외국인에 대한 인식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다. 외국인을 못사는 나라의 노동자가 아니라,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날 안산역 저녁풍경을 가슴에 담아 두었다.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첫 문장은 상징적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강한 메시지다.


인간은 타고난 운명을 부정할 필요도, 굴복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부당하고 잔인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정직한 이야기다. 그래서 삶은 숭고하고 위대하다.


이삭이 선자에게 성경 속 요셉의 이야기를 한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 ‘형들은 나를 헤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였다는...’


선자는 한수와 부적절한 관계로 노아를 낳고, 좋은 사람 이삭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랬기에 듬직한 모자수와 멋진 손자 솔로몬도 얻게 된 것이다. 결국 한수와의 인연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선자로선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결국엔 소중하고 값진 길로 향하는 문이 되었다.


그렇게 보면 선과 악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동전의 앞, 뒷면처럼 입력값에 따라 상반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위기는 곧 기회가 된다. 불행하다고 느껴질 때 숨어있는 행운의 신호를 놓치지 말자.


결말부분, 선자는 이삭의 묘지를 찾아간다. 모자수와 솔로몬의 안부를 전하고, 죽은 노아이야기를 꺼내며 오열한다. 선자의 모든 것이었던 사랑, 첫 아이. 기대를 한 몸에 받을 만큼 빛나고 사랑스럽던 아들.


품에 간직해 온 노아의 사진을 비석 발치에 묻으며 발길을 돌린다. 그 무엇보다 사랑했고 소중했던 것들은 떠났지만, 산사람은 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난의 순간이 있고, 어둡고 긴 터널을 만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절망하며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인가. 인생은 롤러코스터, 내리막이 있으면 곧 오르막이 시작되고...매순간 믾은 일들이 끊임없이 부침하고 명멸하나, 고난을 딛고 일어설 때, 위기는 또 다른 기회로 바뀐다.


오늘도 강물은 유유히 바다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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