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적 꿈
"당신의 어릴 적 꿈은 뭐였다고 그랬더라?"
"응 왜? 예쁜 공주님이 되는 게 꿈이었어. 아마 동화책 영향일거야. 예닐곱 살 무렵 공주시리즈 동화책을 많이 보았거든."
"하하하, 당신다운 꿈이었네."
고층 아파트는 저층보다 좀 더 추웠다. 전면 통창이 썰렁해서 며칠 전엔 방한용 뽁뽁이를 붙였다. 밤이 되자 뽁뽁이를 붙인 창문이 불빛에 반짝거렸다. 여름이 되면 생각이 바뀌어 떼어내고 싶을 지 모르겠으나, 늦가을 썰렁한 분위기가 한결 아늑해서 색다른 분위기를 냈다. 오랜만에 커피향마저 카페 분위기를 내고 실내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림 동화책을 보면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다 예쁘게 나오잖아. 리본이 달린 하얀 드레스를 입은 백설공주나, 신비로운 인어공주 등을 보면서 울고 웃으며 좋아했던것 같아. 동화책을 안고 잠에 들 정도로 한동안 그 세계에 빠져 살았지. 그녀들은 한결같이 착하고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참아내고, 나중에는 다 행복한 모습으로 끝나거든. 아니, 인어공주는 비극이었던가? 암튼 그런 모습에 감동을 받고 공주가 되고 싶었지. 하지만 크면서 현실을 알고 한동안 잊고 살아왔지....어느 날 나의 가장 순수한 어릴 적 꿈이 뭐였던가 생각해보니 그때가 다시 생각나더라구. 그때가 좋았는데.... "
남편은 다른 생각에 잠겨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그 나이때 쯤 뭐가 되고 싶었는데?"
"으응, 난 말야 장군이 꿈이었어. 알다시피 내가 쌍둥이 형이잖아. 1분 먼저 나온. 그러다보니 가족들이 우리를 장군멍군이라고 불렀거든. 애칭이었지만. 자연스레 형인 내가 장군이, 동생이 멍군이가 된거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난 크면 진짜 장군이 돼야겠다고 마음 먹었어."
여자는 작고 동그란 얼굴에 큰 쌍커풀진 눈으로 장난스런 웃음을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큰 덩치가 오늘따라 더 우람하고 듬직하게 느껴졌다.
"장군과 공주라.... 그럼 장군은 공주의 하수잖아."
스푼으로 찻잔을 휘젓다가 그가 말했다.
"그럼 당신이 나의 상사인 줄 알았어? 내 명령을 잘 따르고, 공주님을 잘 모시라구요."
"넵, 잘 모시겠습니다. 공주마마."
그는 한 달 전 근근히 버텨오던 사업을 정리해야했다. 유럽산 지팡이가 대만을 비롯하여 동남 아시아산 물건에 밀린 것이다. 그 동안도 오르락 내리락 아슬아슬 줄타기를 했었다. 최근 몇 달동안은 월급을 가져오지 못했다. 전기세, 물세 등 관리비를 충당하며 겨우 회사를 굴리던 끝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접었던 것이다.
IMF 후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일어서보려 했던 그의 꿈이 좌초된 것이다. 회사를 접어야한다고 말을 꺼내기가 너무 어려워 몸에 맞지도 않는 술을 한 잔 걸치고 돌아와 이야기를 하던 그를 떠올렸다. 반 울음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를 접는게 어때서 그래요. 그동안 최선을 다했잖아. 자기 탓이 아니야. 다 시대와 사회가 변했기 때문에 그런거라구. 대만 제품만 보아도 몇 년 새에 품질이 엄청 좋아졌잖아, 게다가 값이 싸니 어떻게 해본 도리가 없었던 거야."
"회사가 망한 마당에 무슨 이유가 필요해. 다 소용 없다구. 모든 건 결과로 평가되는 거야. 미안해, 으윽...."
눈 앞이 깜깜하고 가슴이 무거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실 위로를 받아야할 사람은 그가 아니고 그녀였다. 그가 생활비를 보태지 못할 때마다 그녀가 어렵게 가정을 꾸려왔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국민평형 집 한 채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녀의 노력이었다.
큰 애가 취직을 하자 한 시름 놓였다. 이제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을 하면 절반의 임무가 끝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청천벽력처럼 딸은 비혼주의를 선언했다. 모든 인간이 기계처럼 같은 모습으로 길을 가야하느냐며 짜증을 냈다.
" 아니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어요. 죽어라 입시공부를 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면 취업준비로 애간장이 녹고, 겨우 취직을 하니 이제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살라고요. 난 결혼 같은 거 안 해요."
아이는 어릴 적부터 혼자 노는 데 익숙했다. 아이들 속에서 소꼽놀이를 하다가도 뭔가에 빠져서 혼자 놀고 있었다. 저녁무렵이면 부부가 차를 마시다 조용해서 돌아보면 아이는 혼자 놀던 곳에 누워 쌕쌕 코를 골며 잠을 자곤 했다. 잠투정 한번 없었고,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의젓했다. 그런 아이가 제 또래들이 시집가서 아이 낳고 잘들 사는데 저 혼자 살아가겠다고 선언 한다. 자라면서 속썩이지 않은 것을 성인이 되어 보답하나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손주자랑에 정신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손주들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란다고 호들갑이다. 부럽지만 애써 마음을 달랜다. 손금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길이 어찌 똑같기를 바라는가. 이제 알만한 나이가 되었으니 자기 인생은 자기가 선택하고 살아가도록 놓아주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