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정자의 꿈

by 한여름

영민한 정자는 제 나이에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자와 같은 소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중에는 집안 일, 농사 일을 거드느라 제 나이에 입학하지 못한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나이가 정자보다 훨씬 많아 덩치가 지만 정자와는 동급생으로 함께 공부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6.25전쟁을 겪은 후라 모두들 가난했지만, 정자의 아비는 대목수로 일하며 전쟁으로 폐허가 곳을 다시 재건하려는 학교나 관공서로 부터 굵직한 일감을 도맡아 일했기에 그시절에도 비교적 밥은 먹고 살만했다.



게다가 정자의 외가는 경남 진주에서도 알아 줄만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기에 정자의 어미는 시집을 올 때 혼수로 자신을 거들며 집안 일을 해주고, 훗날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키워줄 유모를 겸한 몸종을 데려왔을 만큼 가세가 좋았기에 정자는 그시절에는 여자는 살림이나 가르치지 학교 공부를 안시키던 시절에도 정자는 제 나이에 소학교에 입학했다.



정자와 함께 입학한 동급생 중에는 정자보다 4~6살 많은 언니, 오빠들이 많았지만, 작고 영민한데다 다부지기까지 한 정자에게는 한참 뒤떨어졌다.



정자는 유교적 가르침을 받은 어미로부터 아주 어린나이에도 밥상머리 교육을 받아 몸가짐이 단정하고 예의가 바랐으며 달리기, 바느질 등 다방면에 뛰어나 언니,오빠들 틈에 공부했어도 기죽기는 커녕, 학교에서 우수학생으로 꼽히며 자긍심을 가지고 성실히 학교생활에 임했다.



정자가 소학교에 다닐적 무렵에는 또래 여자들은 한복을 입었고, 일제강점기 단발령으로 일찍부터 단발로 머리를 자른 아이도 몇몇 있지만 해방이후 다시금 머리를 길러 댕기머리를 곱게 땋거나 하며 옛 유교문화가 여전히 병행되고 있었다.



대게 남자아이들은 공부보다는 집안의 농사를 거드느라 학교를 갈 때, 소를 몰고와 들에 풀어 놓은뒤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끌고 가기도 하고 한참 일손이 바쁜 농번기에는 걸핏하면 학교를 빼먹는 일이 많아 출석일수 보다 결석일이 더 많은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또, 남학생들은 들이나, 밭일, 가축을 키우기에 편한 복장으로 대부분 남루한데다 천이 턱없이 얇아 추위로 부터 몸을 보호해주기 어려운데다 무엇보다 천이 거칠었다.



정자가 학교에 다닐때는 교복 대신 검정치마에 흰색저고리를 입는게 대다수 아이들의 복장이었으며, 아직 제대로 된 신발이 없어 검정 고무신이나 흰 고무신을 주로 신었다. 책가방도 없던 때라 커다란 천을 잘라 보자기로 만든다음 도시락과 책을 넣어 묶거나 들고 다녔으며 남자 아이들 중에는 활동하기 편하도록 어깨에 둘러메고 집에서 부터 아주 먼 소학교를 가고자 산과 들간을 뛰거나 많은 논밭을 지나 걸어 다녀야했다.









정자는 집안일을 돕는 것보다 소학교에 다니는게 좋았다. 또 배우는걸 좋아 했다.



아직은 학교에 지원이 잘 없어 먼 길을 걸어 학교를 가면 겨우 시간만 배우고 일찍 집으로 돌아 왔기에, 학교를 마친 후 집안일 돕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정자였다.



부모님은 정자 밑으로 아들 동생을 낳고자 동생을 줄줄이 낳았음으로 정자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미를 따라 온 순이어멈의 두 딸과 대가족의 빨랫감을 너른 대야에 머리에 이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냇가로 가 대가족의 빨래를 거들어야 했다.



냇가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 모두 이곳 냇가에서 빨래를 해오며 암묵적인 약속이 위쪽 맑은 물에서는 주로 설겆이를 하고, 아래로 내려오며 더러워진 물가가 빨래터로 이용됐다.



정자는 이것도 모르고 처음 동네 어른들틈에 끼어 앉아 빨래를 씻으려 하자, 정자의 빨랫감을 본 동네 어른들에 날벼락이 떨어 졌다.

"아니, 어린아이 똥기저귀를 여기서 빨면 어떻하누. 저 짝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 없는 곳에서 빨아야제." 하며 무안을 주는 통에 정자는 얼굴이 새빨게져 도망치듯 사람들과 멀찌기 떨어져 부끄러운 마음에 재빨리 빨래를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터에 앉으면 온갖 집안에 시시콜콜한 대소사를 털어 놓으며 한바탕 웃음 꽃을 피우곤 했지만, 정자는 동생의 똥기저기가 부끄러워 빨래를 마치면 부리나케 머리에 들쳐 이고 멀리 집까지 걸어 오곤 했다.



저녁이면 어미는 아이를 젖먹이느라 바빠, 순이어멈에 바쁜 손을 거들며 밥상차리기를 도왔고 어른 남자들이 먼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밥상을 먼저 내고 나면, 남은 음식으로 여자들이 나눠 먹을 밥상을 건드는 일을 도맡았다.



또, 저녁이 되면 전기가 없는 시골마을은 이내 캄캄해지는데, 호롱불을 켜놓고 저녁을 맞았다. 밤이면 주로 한복에 깃을 떼어 새로 빤것으로 교체해 달거나, 헤어진 옷이나 버선에 구멍을 메우며 바느질을 했다. 어쩌다 어미를 졸라 광목의 한귀퉁이를 잘라 얻은 날에는 예쁘게 수를 놓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이제막 사람들은 한복을 벗어 던지고, 일하기 편한 서양의 문물과 양식을 받아 들이곤 했는데 어른들 중에는 멀리 도시에서 온 사람도 있어 간혹 한복 대신 멋드러진 양장으로 한껏 멋을 부린 사람도 있었다. 어린 정자의 눈에는 그 모습이 세련되고, 아름답게 보여 훗날 자신이 크면 한복 대신 멋진 양장 옷을 만드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지금은 비록 뻣뻣한 광목에 풀을 먹이거나, 밋밋한 천에 모양을 내느라 색색이 실을 가지고 수를 놓고 있지만 말이다.






어린 정자의 마음에도 머지 않은 때, 서양의 온갖 문물이 어오면 예쁜 천을 활용해 한껏 멋을 내는 사람들이 더 많아 질거라 막연히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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