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졸혼이 뭐길래 >
2017. 05. 15
네이버 쪽지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모 방송국 토크쇼 프로그램 작가라는 사람이 나에게 졸혼에 관해 취재하고 싶다며 글을 남겼기 때문이다.졸혼에 대해서 쓴 나의 글을 어디선가 읽고 문의한다는 거였는데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어리둥절해졌다. 난 졸혼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없었고 최근 네이버 책쓰기 카페에 올린 글이 전부였는데 그건 카페 회원만 읽기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알고 보니 카페에 올린 내 글 모두가 검색 허용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글 쓸 때마다 일일이 검색 비허용 설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다. 카페에 들어가서 내가 그동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봤다. 참고도서로 구입해서 읽었던 <졸혼 시대>라는 책에 대해 요약 정리한 글이 있었다. 또 수업후기로 올린 글 가운데 부부 갈등으로 졸혼을 고민한 적이 있다는 내용의 글 몇 줄이 눈에 띄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나에게까지 이런 취재 요청이 들어오는 걸 보면 요즘 졸혼이 화재이긴한가 보다.
대학 새내기가 된 딸내미는 사회인문학 교양수업에서 사회현상에 대해 연구 발표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졸혼’을 주제로 발표해서 교수님과 친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20대가 굳이 졸혼에 대해 알아야하는 이유가 뭐냐는 교수님의 질문에 딸은 앞으로 닥칠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에 알아둬야 한다고 답변했단다.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우리 부부가 몇 달 전 졸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딸이 졸혼에 대해 뭔가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도 결혼도 하지 않은 아이가 졸혼을 먼저 이해하게 됐다는 사실은 부모로서 가슴이 아프다. 좀 더 행복하게 사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방송작가가 졸혼에 대해 물어왔을 때 난 솔직히 놀랐고 불쾌했다. 아직 졸혼의 단계도 아닌데 우리 부부가 졸혼했다는 소문이 세상에 다 퍼진 느낌이 들었다.
졸혼에 대한 고민을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터놓고 얘기할 만큼 나는 졸혼에 대해 열려있고 우호적인 편이었음에도 막상 누군가가 ‘너의 졸혼에 대해 얘기를 해봐라’ 했을 때는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 졸혼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기까지 우리 부부가 겪어야했던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 짧지 않았고, 아직 그 고통으로부터 의연해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부부의 사연을 염두에 두지 않은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가정의 졸혼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이혼이나 별거에 대해 대놓고 묻는 게 실례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는 졸혼의 긍정적인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고 앞으로 정말 졸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마음 한편으론 졸혼이 여전히 두렵고 그 단어가 가슴 아프다. 내 가정이 이렇게 졸혼 위기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건 모름지기 한 집에서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 부대끼며 사는 것, 어떤 위기든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 그것이 20년간 내가 믿어온 가정의 참모습이었다.
지금 나는 강원도 원주에 방을 얻어 홀로살기 1년을 감행 중이다. 이 곳에서 민낯의 나와 마주하며 엄마와 아내가 아닌 중년 여자로서의 내 삶에 대해 고민한다. 졸혼에 대한 결정은 1년 뒤로 미뤄뒀다. 내가 좀 더 여유를 찾고 삶에 대한 자신감과 긍정성을 회복할 때 비로소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한동안 봄 하늘을 뒤 덮었던 미세먼지가 걷히고 나더니 오늘은 창밖으로 보이는 치악산 줄기가 한결 더 우람하고 푸르게 다가온다. 이제야 비로소 산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 인생도 지금 위기를 맞아 희뿌연 먼지에 갇혀있는 듯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먼지가 걷히고 시야가 훤하게 밝아질 것이다.
나는 성급함을 경계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리고 인생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 지금은 먼지가 걷히길 기다려야 할 때라고 일깨운다. 그래, 일단 지쳐있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