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이 곡선을 기울이다
[변곡점] by 버벌진트
[변곡점] by 버벌진트: 나무위키
인간은 불완전하며, 삶은 불온전하다. 그리고 그것이 곧 우리의 인생곡선을 그린다. 곡선은 불균형을 이루며 그 균형을 무너뜨리는 지점, [변곡점]은 무수한 성취와 과오에서 비롯된다. 우연에 의해서든, 나의 선택과 행동에 의해서든 그렇게 하여 발생한 변곡점은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른 다음의 변곡점을 만들게 된다. 각자가 맞닥뜨린 불완전함에 대처하는 방식. '과연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물음에 다가선다.
| 오점이 때로는 곡점을 남긴다 (추적/진실게임)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때로는 오점을 남긴다. 사소한 실수부터 돌이킬 수 없는 참사까지, 누구나 살면서 과오를 저지르기 마련. 그중 쉽사리 감당하기에도 벅찬 과오는 균형을 이루던 삶에 반영구적인 흠을 남기며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사건 이후로 우리의 자의식은 진상을 두고 정신없는 공방을 벌이며, 우리의 자취는 양심으로부터 추적을 당한다. 그로부터 선택은 크게 도피, 아니면 반성으로 나뉜다. 예컨대 '2016년 6월의 그 밤 신석초 앞(버벌진트의 <추적> 가사 중)'에서 자신의 인생사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고만 버벌진트의 그날, 방송 카메라 상으로 비친 그의 우회와 면피성 자백은 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숙인 직후부터 그가 사건을 포함한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본 끝에 우리에게 내민 기록들은 분명 후자에 해당한다. 부끄럽지만 그제야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는(<진실게임> 가사 중)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이후에 갈 행선지의 방향성을 결정짓는다. 바로 오점이 곡점을 남기는 순간이다.
| 자기반성 0. - 참회록 (그것이 알고 싶다 ~ 연말 결산보고서)
반성을 택한 자의 첫 번째 과업은 자신의 과오를 외면하지 않는 것. 실책을 인정하고 이를 정면으로 목도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과업을 실천하기 위해 실책의 순간, 뿐만 아니라 사죄와 참회의 매 순간 들을 기록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진술한다. 그것은 언론에서 일반적으로 비치는 연예인, 혹은 공인의 일시적인 해명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다. 당시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회고부터 현재 자신의 근황에 관한 저술, 혼란과 방황의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이로부터 벗어나고픈 심정 등 내용은 다양하다. 어찌 되었든 진술은 변명이 되지 않고, 참회는 번복이 되지 않도록 마치 월/연간 업무보고처럼 이를 반복한다. 그것이 일종의 자기암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두 번 다시는 저지르지 않으리라.', '과거의 몹쓸 나와 작별하리라' 등의 주문을 각인시키는 것. 자세는 엄중하며 언행은 일관되도록 내면으로부터 수련을 거듭하는 과정. 정령 과오는 용납받지 못할지언정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책임을 지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곧 갱생의 여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변곡점]은 이를 위한 증명의 노력, 이에 대한 결과가 될 것이라 믿으며.
| 자기반성 1. - Gone for a Minute
"One day you're here, the next day you're gone."
([Go Hard Part 1 : 양가치] 수록곡 <Gone> 中)
반성을 택한 자의 두 번째 과업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그간의 행적과 자신의 내면을 거닐고자 하는 자는 홀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사회로부터 스스로의 유배를 강제한 채 거듭하는 수련을 자숙이라 일컬으며, 이는 곧 있던 자리를 잠시 비우는 은둔의 시간이 된다. 잠시 떠난 사이에 자연스레 그 자취는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점차 사라지고, 보다 오랜 긴축의 삶을 지속할 것이다. 그렇게 동력을 내려둔 삶에는 죄의식과 고독이 대신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남긴다.
과연 유배당한 자의 고립은 누구의 몫인가?
그를 탓하며 떠나가는 주변은 누구의 탓인가?
자신을 미루어본 버벌진트의 답은 이렇다.
내가 지은 죄니까 짊어질래 나의 짐, 내 앞길의 초는 내가 친 꼴
내가 더 이상 알 켈리를 듣지 않듯, 누군가에게 난 아웃 알아
과오를 직면하기로 다진 이래 삶의 고립과 피폐에 대하여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자에게 타인의 실망과 냉대란 그저 그래야 마땅한 반응일 뿐이라는 듯, 은둔하는 자로서의 업보이자 그로 인한 고독이라는 듯. 그럼에도 이를 묵묵히 감내하기가 어디 감히 쉬운 일인가. 그것은 이전까지 받아왔던 사랑과 관계로부터 작별하는 일. 그것이 비록 자신의 실수와 타인의 실망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고 할지라도 이를 주변의 도움 없이 홀로 감내하고 죄의식으로부터 극복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Hey VJ by 나무위키
Hey VJ What you been doing these days
Oh, I've been maintaining 하루에도 현자와 폐인의 경지를 왔다 갔다 하는 중
아직도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중
그리하여 연신 괴로워하며 홀로 거듭하는 반성. 답을 찾는 과정에서 어떤 때는 금방 찾아낸 듯싶다가도 어떤 때는 이를 번복하며 다시 무기력해지기 일쑤. 해탈과 폐인을 오가는 혼란 속에서도 기어이 성찰할 것은 무엇인가? 과거의 실수를 극복하기 위해선 변화된 미래의 자신을 다짐하는 것. 돌아본다는 것은 이를 위한 행위이자 과정. 중심을 잃지 않고 삐꺽 대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잠시 잊고 있었던 일상을 주워 담으며, 여유와 안정을 찾은 뒤 아주 천천히, 자신의 인풋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 자기반성 2. - 킨츠기(きんちぎ)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모든 것에는 금이 가 있다. 그래서 빛이 새어들 수 있는 것이다.) by 레너드 코헨
킨츠기, 그것은 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불완전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수선하는 '잃어버린 조각 찾기', 성찰을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상처를 수용하여 그릇을 복원시키는 삶의 철학이다. 반성을 택한 자의 세 번째 과업은 받아들이는 것. 일명 '소확행'을 병행하며 일상을 주워 담는 행위는 삶의 단순하면서 본질적인 긍정을 수확함으로써 흠을 아물게 하는 와비사비(わびさび: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동양의 미적 관념) 미학의 실천.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함에 따라 '야심으로 찼던 시작과는 다르고 예상으로부터 빗나간 것들이 많은' 인생곡선과 그로 인한 좌절을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키는 관념이다. 그에 따라 어둠 속에서도 삶에 대하여 관조적인 자세를 유지한 채 천천히 산보를 행한다.
혼자라 느낄 때 나의 손 잡아
준 너에게 감사해 이제 곡마다
네 얘기를 담을지 몰라 난 yeah.
(중략)
하지만 삶이 내게 준 것 중
제일 고마웠던 선물 It's you.
이의 실천에 따라 방황 중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또 다른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과연 유의미 한 성과일 터이다. 이를테면 극복을 향한 홀로서기 속에서도 여전히 곁에 남아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던 인연들을, 그들로 하여금 주어지는 삶의 만족과 감사함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소중함을 장작 삼아 성찰의 라임을 써 내려가며 삶의 박자를 되찾고 자신의 그릇을 새로이 복원한다. 그것이 반성을 택한 자가 여태껏 행했던 방랑의 의미일 테다.
| 자기반성 3. - 나는 하수다
킨츠기의 과정을 통해 바라본 우리는 흠투성이에 하염없이 부족한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깨달음이 삶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오히려 겸손과 배움의 자세로 주변을 흡수하고 경험을 쌓는 바탕이 될 순 없을까? 삶을 더욱 감사히 여기며 곡선의 방향성을 재설정할 수도 있진 않을까?
버벌진트는 10년 전의 곡을 다시 꺼내었다. 거기에는 스스로가 선택한 삶을 축복하던 때, 주변의 반대 따윈 무릅쓰며 자신의 선택에 당당하던 때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에게도 우여곡절 속에서도 근성으로 꿈을 밀어붙이던 젊음의 시절가 있기 마련이다. 불온전한 길일지라도 목표만큼은 확실하고 과정이 즐겁기에 행복하던 그때를 되새긴다. 그 시절에도 곁에서 언제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Go Easy by 나무 위키나는 내가 고수인 줄 알았지
but now I'm like I'm 초보 살살 please
그리고 그것이 그가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본 곡을 꺼내 든 이유일 것이다. 한 때는 저돌적이고 다소 거만하기까지 했던 [무명]의 20대를 지나, 사회와 타인이란 것을 깨닫고(비록 거기엔 음악적 회의가 동반된 탓도 있었지만) 막 주변을 흡수하기 시작하던 [Go Easy] 30대의 시절까지를 회상한다. 거리와 노래방에 '좋아 보여'가 퍼지며 한창 상승곡선을 이어가던 그때의 그도, 그럼에도 상업 시장의 구조와 생태를 이해하기 시작할 즈음 깨달았다. 자신은 여전히 하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 *Question: 누구를 향한 책임인가 (내가 공인?)
흑화의 뜻 by 나무위키자신의 과오에 따른 관계의 종말, 그리고 그것에 대한 스스로의 인정은 진중한 반성과 책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누구의 탓으로도 돌리지 않았고 한 때 부풀었던 오만 역시 내려놓았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어떠한 존재로서 반성에 임하고 있고, 무엇을 위해 임하고 있으며, 어떤 이유로 임하고 있는 것인가. 그 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는 40년가량의 고군분투했던 세월을 반성한 덕택에 그간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인연들을 소중히 하는 법을 배웠다. 동시에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분하는 법 역시 배울 수 있었다. 후자의 경우 평소에는 호의를 보일 지라도 진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이를 '비즈니스'라 일컫는다. 그들의 관계에선 흔히 이중성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떠나는 것은 사랑을 지키지 못한 탓으로 인한 실망과는 전혀 관계없다. 대개 그들의 경우에는 세월이 쌓임에 따라, 더 이상의 이용 가치를 느끼지 못함에 따라 자연스레 소멸한다.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우리의 행복을 시기하여 패배와 추락을 기다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여기서 질문을 남긴다.
우리가 행하는 자아성찰은 과연 그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인가?
우리의 책임이란 누구에게 향해있는가?
비단 유명인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우리의 사생활마저 그들은 험담의 소재나 가십 거리로 이용하고
실수 하나에도 무리한 책임을 요구한다.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어김없이 사냥을 시작하는 것이다. 멸시를 위한 명분이 필요하던 그들에게는 덧없이 좋은 기회일 것이다. 우리의 성찰은 책임을 짊어지기 위한 것이었던가, 혹은 책임으로 이용당하기 위한 것이었던가? 적어도 우리의 책임은 후자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향해 있지 않다. 예술가는 이를 인지하고 오로지 프로로서, 무엇보다 '인간 김진태'로서의 반성에만 전념하며 그것이 곧 예술가이자 인간의 본분이다. 자신을 포함하여 사랑하는 이들을 실망시킨 죄를 뉘우치고 변화하기 위해서.
| 業: Karma
성찰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한다. 과거 속에는 변화로 하여금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준 여러 곡점들이 존재한다. 그 곡점들로부터 우리를 다시 보는 것. 나의 과거는 어땠으며 현재의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아홉에 처음 마주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기 시작하고, 열아홉에 본격적으로 세계에 발을 드밀어, 스물아홉에 세계의 길을 튼 예술가. '그 놀라운 세월들이 어쩌면 서른아홉이 된 현재의 괴로움에 대한 인과응보가 되고만 것이 아닐까'라고 그는 생각한다. 업보(karma)를 믿든 믿지 않든, 가령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홉수 따위 등으로 불리든 분명한 건 자신을 돌아볼 틈 없이 자꾸만 팽창하던 과거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브레이크(break)된 순간을 만들었다. 삶이란 불온전하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과거로 하여금 오점을 남기고 곡선을 기울인다. 그렇게 곡선과 각 곡점들은 새로이 미래를 수립하기 위한 데이터가 된다.
| The Youth: Carpe Diem!
또한 과거는 현재, 그리고 젊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방지턱 마저 무시한 채 과속 중이고 그로 인해 언젠가 화를 면치 못할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구태여 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세월의 비가역성으로부터 두렵고 조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회 없는 과거를 남기기 위해선 행동 하나에 조심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지체 없는 쳇바퀴를 돌려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혹은 그 덕분에 우리는 여태 생존하고 있다. 이에 감사하고 더욱 분노하며 열렬히 춤을 추는 것이 젊음, 그것의 역할은 앞으로의 곡선을 완성시키기 위한 핵심적인 바탕이자 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현재에 충실하고자 한다. 현재는 곧 다시 과거가 되어 미래에 대한 업보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인하여 미래를 허송세월 보낼 여유가 없단 뜻이며 우리가 여태 미래를 향해 조급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이전에는 악업이었을지라도, 이후에는 본인의 의지와 행실에 따라 선업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만연 하단 뜻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과거라 일컫는 데이터의 지혜로운 활용은 마냥 붙잡아두는 것보다 가치로서 환산하고, 반성하여, 받아들인 다음에 지나 보내는 것. 그것이 곧 불완전함에 대처하는 성인의 노하우이니라.
| 변화, 그것은 불협화음과 충돌의 연속
나무위키
우리는 변화라는 것을 경험하는 매 순간 충돌과 혼란을 반복한다. 적응과 부적응 사이를 오가며 두려워하고 어떤 때엔 그리워한다. 어떤 때에는 절망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답을 갈망한다. 그것의 연속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곧 인생곡선. 인생은 불완전하기에 그 연속은 언제나 마찰로 인한 불협화음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이는 성인이 되었더라도, 성찰을 해냈더라도, 받아들임을 깨달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의 첫 느낌을 잊게 될까 불안은 커지고 분노는 무뎌지며 되물음은 지속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란 그렇기에 긍정적인 것이다. 변화란 그렇기에 삶을 드라마로서 기능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다음을 위해 투쟁하게 한다. 그것이 변화의 역할이자 곧 변곡점의 역할이다. 이전까지 행했던 성찰, 참회, 은둔, 수용은 과오를 포함하여 더 이상 세월을 부정하지 않고 불완전함, 그로 인한 변화를 긍정하기 위한 일종의 절차였다. 우리가 여태 겪었던 실수와 마찰은 모두 성장의 과정이었으리라.
| 각성: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소금과 빛 이거 없인 못 살았어
내 작은 호흡까지 이게 배어났겠지
아마 의도완 달리 서 있었겠지 아주 날카로운 칼이
내 귀에 다른 이야기는 소음같이
들렸지 아녔으니 정해놓은 답이
그 불화의 이유 다 아주 잘 이해 가 이젠 다
내 두 발 디딘 곳이 내 눈 닿는 범위를
정해준다는 거
미안함은 없어 피차 마찬가지
각자의 꿈을 꾸며 삶을 산 거지
이제 난 새로 눈을 떴어 각성의 양가치
또 보지 못하겠지 시야 밖의 나머지
새 청사진 새 미래를 구상해 인간은 절대 안 바뀐대 내가 그 반례
될게 뭐가 기다릴지 내일의 내 삶에
그다음 이야기는 다음에"
김태균 [상업예술] 수록곡 <상업예술> 中 - 버벌진트
질긴 충돌과 성찰 끝에 마침내 각성을 이룬다. 그것이 작품의, 그리고 이전에 저지른 과오 이래 그가 행했던 참회의 나날 끝에 맺은 변곡점의 완성이자 진(眞) 엔딩이다. 그는 그간 사자로서 낙타, 혹은 자신과 반대되는 이치와 세상, 그리고 악업에 처한 동안에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투쟁해왔다. 투쟁은 유의미했고 그는 다음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상처를 딛고 마침내 일어선 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될 준비를 한다. 각자의 입장, 시선, 답, 그로 인한 불화와 실망마저 더 이상의 자만 따윈 없이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인 순간 분명한 내일이 보이는 것. 그렇다면 다시 집중할 차례다. 변곡점을 완성시켰다면 다음은 곡선의 상승세를 끌어올릴 단계, 그 뒤는 성숙과 초연, 순진무구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마주할 희망이다. 그것이 성찰과 투쟁의 의미이다. (본 파트는 [변곡점] 앨범 내에서가 아닌 김태균 [상업예술]의 수록곡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 변곡점 Outro. 불완전함이 곡선을 기울이다
나무위키그렇게 질긴 세월을 담보로 충돌과 혼란을 일으킨 불완전함이란 자신을 더욱 빚어 완성시키는 매개체였다. 삶의 낙차를 이끌고 드라마를 창조케 했다. 어른에 어른이 되는 그 날까지도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는 많은 흠과 부족함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픔을 새기고 지난 날을 되묻게 하며 그렇게 나아가도록 했다. 확신에서 때로는 의심으로, 그러다가도 희망으로 옮겨지는 삶의 곡선 속에서 우리는 수 없이 자신을 다져왔다.
우리는 변곡의 순간을 온 몸으로 맞닥뜨리고 받아들이기로 택했다.
오독을 끌어안은 채 결코 멈추지 않는 성장 페달
성숙은 그렇게 도달하고 다음 이야기는 그렇게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