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생존의 시대에서

사유를 위한 감상 | [Cliché] by 키드밀리 X 드레스

by 감상주의
나무위키

자본 시스템에서 예술가는, 그리고 청춘은 무엇을 위하여 분투하는가? 돈과 성공을 좇는 사회 청년의 모습은 지극히 [클리셰]스러우며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답을 토대로 목적을 향해 나아가던 이십 대의 청년이 그 끝자락에서 맛본 인상이 성취가 아닌 '허무'인 건 어째서일까?

그 쓴웃음마저 이제는 마스크에 의해 가려지고

만 팬데믹 시대의 현재. 생존을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잃어가는가?


-혹은-

다른 말로 그 안에서 무엇이 남는가?


| Prologue #1. 사멸하는 젊음

oh Sometime, Sometime 기억해 내 어릴 적을
결국 난 어디로, 내 마음은 파도 같구나
퍼져가, 뭔가 잘못된 것 같기도 해
나의 젊음은 조용히 죽어가네
(leave My Studio 中)


각자의 꿈이나 가치, 그에 따른 부푼 기대, 혹은 최소한의 생존 의식을 동력 삼아 뛰어든 생활 전선. 청년들은 분투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연소시킨다. 과열에 가까울 정도의 전력을 다한 뒤의 젊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사멸'이다. 이를 '번아웃'이라고 일컫는 근래 사회에선 처음 발을 들였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


이러한 간극은 오늘의 나에게 벅찬 압박과 피로를 남기고, 아름답고 소중했던 어릴 적 모습은 안타까운 미련과 공허를 남기며 더 지나면 그마저도 잊게 되고다. 흔히' (이조차도 이제는 [클리셰]적인 문구가 되어버린)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라고 표현하는 그 간극으로부터 충돌을 거듭하던 개인의 태도는 이내 체념에 이른다.


이는 어느 유명 예술가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일전에 얻어낸 다소 소모적인 관심은 어쩌면 본래 그가 기대했던 가치와는 사뭇 다르고, 그간의 투쟁으로 이루어낸 성과와도 거리가 멀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조차도 배부른 소리로 치부될 뿐인 그의 삶 역시 혼자서 감당하기에 벅찬 책임과 불안 등을 짊어지고서 이어가는 고행의 연속이었으며, 그의 젊음 역시 우리와 다를 것 없이 허망하게 사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그러한 시간을 원망하고 있었다.


'시간은 과연 우리를 버린 것일까?',

'왜 지금 내 마음은 어릴 때와 이토록 다를까?', '지금 나는 어째서 지쳐가고 있는 걸까?',

'이렇게 죽어가는 끝에도 과연 무엇인가 남아있긴 할까?'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 Prologue #2. Are We Free?


Stay Home, Keep Safety


탑데일리 뉴스


2020-2021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팬데믹 사태로 인한 범인류적인 고립은 사회를 대공황 상태로 밀어 넣고 시스템에 존속하고 있는 개인의 생존 의식에 적신호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대공황이 초래한 비자유는 다시 개인의 생존 의식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우리의 행위는 자유라는 이상 가치의 실현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경제적 부유함과 사회적 인정으로 직결하는 물질 사회에서 개인의 결정은 '현실'이란 관점에 의하여 학습된다. 경제 사회적 기반이 갖춰진 시점에서야 우리는 생존을 인정받을 수 있고 생존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수준까지 그 기반이 충족될 때야 비로소 자유의 실현, 즉슨 성공을 인정받을 수 있다.


예컨대 예술계에서 소위 (현재는 이러한 취급마저 진부해진)'언더'를 지향하던 예술가가 미디어에 출연하고, 캐릭터를 설정하고, 이미지 쇼를 펼치고, 음원 차트를 공략하고, 자신의 하이프를 끌어올려줄 백업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단순하다. 앞서 언급한 기반을 충족하기 위해선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


아이러니한 건 그러한 정석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가치 실현의 의미는 충돌하고 이내 상실한다. 자유롭고자 택했던 방식이 오히려 개인의 자유의지마저 통제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로를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고 믿었던 '생존과 자유가 사실은 오히려 양립이 불가한 개념'이었다는 말인가? 혹은 정해진 루트대로 그저 진부하리만큼 이행할 뿐인 맹목성, 불안정하고 도취적인 소비 습관, 기계적인 대인관계에서 비롯된 우리의 착오에 불과한 것일까?


유명인이나 예술가가 일반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명인은 무엇이든 누릴 수 있고, 예술가는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짐작, 흔히들 그들의 위치에 자리하면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그 과정과 이면에는 그들조차 예외 없이 혼란과 좌절로 얼룩져 있었다'라고 한다면?


작품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 '그녀'.

그녀가 처음 예술에 발을 들였던 계기는 단지 순수한 동경이었다. 그러나 예술계조차 당연했던 시스템의 원리는 무명 지망생의 기대를 무심하게 짓누를 뿐이었다. 그렇게 불안과 자조를 조성하는 시스템의 압박은 곧 그녀의 맹목성을 부추겼다.


어느덧 무명인에서 남들이 동경하는 유명인의 위치까지 오른 '나'(그녀 > 나)는 본래 좇던 가치를 진작에 상실한 지 오래다. '나'에게 압박을 가하던 주변은 그가 성공함에 따라 과정이 맹목적이라며, 혹은 순수 예술의 본질을 배반했다며 그간의 분투마저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비방하기 바빴다.


어느 의미에서도 우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각자의 좌절과 서로를 향한 증오로 수 없이 상처를 쌓아 오던 생존의 시대는 2020년에 이르러 사상 초유의 역풍을 마주하게 되었다. 성공을 갈망하던 예술가나, 그러한 성공을 비아냥 거리던 이들이나, 이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칼을 겨눌 때가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시대로부터도, 시대에 의한 서로 간의 불화로부터도 당장의 우리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만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해방을 이루어내기 위해선 버틸 수밖에 없다. 자유와 양립이 불가하다고 믿었던 생존이란 개념은 곧 자유의 존립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껏 자신을 희생해 가며(그 과정이 설령 맹목적이라는 이유로, 수동적이라는 이유로, 진부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 의식을 기어이 불태워 온 것이 아닌가.


생존의 시대에서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 Cliche type #1: Intro.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
사람들이 나를 찾던 순간을 값지게 보내지 못했던 거 같아서
HipHop LE 인터뷰 中

자유를 갈망하던, 그래서 생존의 시대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던 청춘은 시스템의 가르침에 따라 '하늘 위'를 목적으로 하여 하염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기 시작한다. 가히 광폭적이라 할 만한 그 질주는 브레이크의 순간을 우려하는 이성의 경고마저 무시한 채 그 목적만을 향할 뿐이었다.


그렇게 목표하던 위치를 겨우 겨우 쟁취해 낸 자가 다음으로 취할 행동은 무엇일까? 청년은 그동안 갈망했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었기에 그 자유를 소비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설령 처음 설계한 이상향과는 다른 방향이라 할지라도, 어렵사리 이뤄낸 성공에 대하여 그것에 당장 충실해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일어난 것 마냥.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신분 상승'이라는 경험은 짜릿하면서도 정작 그 경험에 있어서 청년은 어리고 미숙했다. '자유'라는 환경에 대한 실감을 지속하기 위해 불안정한 소비 생활과 인간관계의 대체를 반복하던 그. 달콤한 쾌락을 맛본 이상 자유의 영원을 욕심내는 것은 당연지사. 과연 그가 안착한 위치는 그가 얻은 자유의 영원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지독히도 달콤한 현재의 순간은 훗날 성취로 기억될 것인가, 혹은 독으로 기억될 것인가?


과연 그간에 이뤄낸 성취가 남기게 될 것은 무엇일지?




| Cliche type #2: Challenge -

I'm different


네이버 지식 백과: ICT시사상식사전


'밈'과 '챌린지', 그것은 MZ세대의 소비 방식을 겨냥하여 유명세를 얻고자 하는 이들에겐 (본인 또한 세대의 일원으로서) 효과적인 마케팅 및 생존 전략에 해당한다. 대개 숏폼 콘텐츠 특유의 '화제성'에 가치를 투자하여 자신이 직접 선도하거나 혹은 합승하는 식이다. 그것은 앞서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캐릭터 설정, 미디어 출연, 이미지 쇼의 종합 활용인 셈.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단순한 예능부터 개인의 작품 홍보는 물론 단번의 스타성 확보 및 문화를 주도하는 노릇까지 가능하다.


이러한 범용성 덕에 플랫폼을 이용하는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다. 하이프 업을 이뤄내거나 업된 하이프를 유지하려는 루키, 재기를 노리는 한 때의 스타, 신 세대와의 동행을 통해 흐름으로부터 뒤쳐지고 싶지 않았던 베테랑 등. 예술가부터 방송인, 스트리머, 이제는 기업인과 정치인 등에게도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 되었다.


나랑 안 맞네 요즘 유행이라며 Challenge
내게 선배들이 누구야
그거 하고 있는 쟤네야?
왜 다 일 안 하고 하고 있는데 코미디


반면 혹자는 콘텐츠의 '단발성'과 '소모성' 등을 지적하며 차세대 플랫폼의 대거 유입을 경계하기도 한다. 작품 속 화자의 태도를 예로 들자면, 그들의 방식이 프로로서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할뿐더러 단발적인 쇼를 연출하고 소모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만 집착한다고 여기는 것.


이와 같은 우려는 비단 '챌린지'뿐만 아니라, 사례만 다를 뿐 이전부터 유사한 케이스의 연속이었다. 오디션/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시장 점유, 공연 위주 아티스트의 방송(예능으로 대표되는) 출연을 통한 메이저 진출, SNS를 향한 병적인 집착, 소셜 미디어 콘텐츠와의 콜라보를 통한 조회수 공략 등이 그 예. 이는 역사적으로 줄곧 발생해 오던 문화 생태계의 뉴-웨이브 현상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우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작용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순수에 대한 배반을 문제 삼으며 '아래서나 위에서나 그녀에게 가해진 주변의 공격' 역시 그러한 반작용의 맥락이었을지도 모른다. '챌린지' 등에서 비친 그들의 '맹목성'으로부터 덩달아 자신의 가치마저 상실될까 두려워 경계한 것이다/ 혹은 모종의 이유로 이미 가치를 상실해 버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그녀를 제물로 삼은 것이다.


화자의 경우, 맹목적인 방식으로 성공하려는 그들로부터 자신만큼은 포함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적어도 그는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가 그들의 방식보단 가치 있게 남아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부업이라며 자존심 내세워 자신을 변호하는 그들'의 행태도 이와 같은 이유였을 수도 있지만.


작품 중반부 내내 만연하던 자기 과시와 호전성 역시 가치 상실의 경계 / 상실된 가치의 변호로부터 기인한다. (전자에 해당할 경우) 그는 경쟁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성취로 하여금 언제나 그들보다 최상급이며, 그러한 신분 상승이야말로 맹목성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이 고수하던 가치대로 이뤄낸 쾌거인 만큼 당당하게 프라이드를 내세울 만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 (후자에 해당할 경우), 목표를 위해 비즈니스의 세계에 들어서는 과정에서 본래 지니고 있던 순수가 무뎌졌음을, 그들이라는 범주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친구가 말해 다들 가지 각자의 길로
계속 걷고 움직여
우린 살 길 찾을 뿐인 거고
문제는 서로 기억하네 좋았던 장면뿐을
뒤 시간이 가고 말해 너도 결국 변했구나


그러나 그 역시 쟁취의 과정을 겪으며 결국에는 변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역시 생태계에 존속하기 위한 적응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일부 비평가들 사이에서 그 역시 미디어 및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두고 논란의 여지로 삼았던 것처럼). 어찌 보면 그것은 그가 저격하던 그들의 방식, 그리고 주변인들이 저격하던 그녀의 방식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투자의 세계에서 손실과 희생을 감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비즈니스니까. 화자나, 그들이나, 그녀나, 모두 치열하게 자신을 경영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투자에 따른 대가가 곧 '가치', '순수', '이상'등의 상실로 발현되는 것뿐이겠지. 그럼에도 우리가 그토록 상실을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이유는 겨우 고생하여 얻은 '자유'의 의미가 퇴색되고 그 당위를 침해받고 싶지 않아서다.


생태계의 급변은 이제 막 적응을 마친 개체에게 혼란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2020-2021년의 경우에는 숏폼 / 소셜 미디어 콘텐츠, 그로부터 파생된 챌린지, 밈 등이 그러한 급변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아무리 갈등하고 경계하여도, 이전에도 그러하였듯 결국에는 적응할 것이며 마침내 변할 것이다. 그들이 몇 초간의 쇼 따위에 별의별 안간힘을 쓰던 그 모습을, 언젠가는 이해하거나 수긍하기 시작할 것이다(그것이 체념에 의해서든, 포용에 의해서든 말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한번 '변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당위를 물을 것이다.


생존을 위했던 우리의 방식, 두려움이나 확신을 과연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가?





| Cliche type #3: Prime Time (Bittersweet - Bankroll)


네이버 포토뉴스

시스템의 논리에 의하여, 성공하려면, 자유를 쟁취하려면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예술가는 돈을 버는 자신을 구태여 전시해야 했다. 그렇게 돈을 버는 이들의 이야기가 모여 어느덧 예술계를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클리셰]를 형성하게 되었다. 논리에 충실했던 예술가, 이번에는 논리에 의해 형성된 그 클리셰에 충실할 차례다. 그것이 곧 자기 과시의 원리가 되리라.


화자는 소속사와의 계약 체결, 미디어를 통한 하이프 업을 통하여 대중적인 면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원하던 부유와 명성을 갖추게 되었고 시스템의 관점에서 이는 명백한 승리였다. 이후 그는 그 승리를 유감없이 기록해 왔다. 그리고 그 기록 속에는 여타 동시대, 동일 장르계 아티스트들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온갖 자아도취의 향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기록들은 달콤한 성취의 이면에 깔려있는 씁쓸한 냉소를 은연중에 내비쳤다.

돈을 마음껏 흩뿌릴 수 있는 현재의 위치는 논리에 따라 깔 맞춘 차갑고 건조한 스탠스, 유지비의 충족을 위한 피로, 인간관계에서의 회의, 각종 스캔들과 루머 등에 비롯된 악의적인 정치 등을 동반한다. 작품의 중반부는 인트로에서 암시한 '불안정한 소비 생활과 인간관계의 대체'라는 내러티브의 연장선상.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한 예술가는 자신이 성공했음을, 성공으로 직결되는 물질을 비로소 쟁취했음을 체감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증명해야만 했다. 설령 그것이 '교만하다', '무의미하다', 혹은 진부한 '클리셰다'라고 비판받을지언정 증명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존재와 환경을 모조리 물질과 비즈니스로 도색하고 그것을 기록해야만 했고, 거기에 인간관계도 예외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것이 셀럽의 삶이다.


한때는 갓 유명인이 된 어느 개인의 과시를 그저 장르 예술계의 클리셰로만 인식하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플렉스'라고 칭하는 근래의 소비 현상은 MZ세대라 일컫는 현재의 대중 사회의 상징이 되었다. 자기 증명과 보상 심리의 반영이라는 전문가들의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남기고 결핍을 채우고 싶어 하는 동물인 것이다. 그리고 물질 사회에서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은 어김없이 물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과시라는 장르의 속성이 현재까지도 유효한 이유인 것이다.




| Cliche type #4: 사이클 (V I S I O N 2021)


장르계에 이토록 줄곧 서술되어 온 그 진부한 기록들은 축적을 거듭하여 시스템을 가동 및 순환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이에 더 나아가 2020-2021에 이르러서는 현 시국과 맞물려 사회에 전에 없던 전망(vision)을 제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고되지 않은 비일상으로 인한 사회적 구속과 경제적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일상에서 영유하던 자신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계속 분투하고, 욕심내고, 소비하고, 어필하는 행위가 사회 흐름이 되었고 그간 예술가의 성공 서사와 과시적인 표현은 당위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무심한 사실은, 이러한 급변과 흐름의 연속 가운데서도, 경제 시스템의 사이클은 마치 변함없는 계절의 반복처럼 아무런 미동과 감정도 없이 잘도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은 불가항력적으로 흘러가고 그에 따라 개인의 고된 일상 역시 사이클을 따라 쉴 틈 하나 없이 페달 밟기를 계속한다. 얼마나 목표를 이루고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든 간에, 얼마나 스스로가 그 성공에 자부와 당위를 느끼든 간에, 그 사이에 얼마나 사회와 경제가 성장을 이루었든 간에, 체제의 지독한 사이클과 페달 밟기란 결코 멈추는 일이 없다.


단서는 바로 그 지점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우리가 스스로 설정한 목적의 끝자락에 근접할수록 '성취'보다' 허무'가 먼저 와닿는 이유에 대한 단서를.




| Cliche


반복했고 난 came a long way
이 높이의 시야에 들어오면
네 favorite rapper가
___을 씹어대는 것뿐


정상(頂上), 그것의 다른 말은 시장의 중심부. 중심부에 들어서며 대면한 현실은 청년을 조소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어쩌면 이 시스템이 웃는 방식이며, 그가 얻었다고 믿어 온 자유는 '어설픈 자유'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모르리라. 쟁취한 자유를 소비하고 과시하는 사이, 체제는 청년을 현실로 흡수시키고 기존의 이상을 처절하게 붕괴시켰다. 들어서는 것조차 어림도 없다 여길 만큼 견고하게만 보였던 사회의 민낯은 사실 허상과 기만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그가 느낀 간극이다. 자기 증명의 수단인 체하며, 실속은 그 허상이라는 밑천을 가리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했던 노랫말과 차림새로부터, 그는 그 허술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과거의 동경을 자처하던 예술계의 셀럽들이 유지해 온 이미지와 그것의 배후란, 어이없게도 흡사 뒷 세계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간의 페달을 밟으며 쌓아 올린 공은 그들의 허술함과는 분명 달랐다. 오랜 무명의 기간을 거치며 고된 노력이 축적된, 함부로 그들의 입으로부터 폄하당하지 못할 그런 가치였다. 그러나 현실에 흡수되면서 본래의 가치는 많은 것을 희생시켰다. '변했다'라는 말로 누군가는 그 가치를 폄하하고, 누군가는 그 가치를 이용한 뒤 관계를 끊었다.


그는 그러한 시기와 위선, 배신과 기만으로부터, 그것들의 허술함으로부터 기껏 이루어낸 승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허망하게 자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면을 쓰고, 감정을 덜어내며 이제껏 쌓아 올린 부와 명성으로 성벽을 세웠다. 그 벽은 그것들이 마치 자연의 섭리라도 되는 양 지껄여대는 체제의 사이클로부터 (이미 훼손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나마의 가치라도 훼손당하고 싶지 않았던, 무의미한 페달이고 싶지 않았던 우리들의 필사적인 저항이자, 방어이자, 생존 본능이었다.


20억을 벌었어 난 믿기지 않지
10년 전의 내게 말하면 걘 피식
순수를 간직한 날 만나면 내가 말하려 했지만
시급 4500원에 할 걸 피신

돈을 꺼내 쌓으면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
난 전혀 기쁘지 않네
놓쳤지 많은 걸
Family First 돈은 다음 명심해
이 돈은 가고 네 곁엔 가족만 남거든
난 다 잃었지
- cliche 中


아이러니하게도, 그 지점에서 자신을 지켜내고자 했던 선택은 곧 젊음이 사멸하는 꼴(비록 자멸은 면했다 하더라도)을 부추기고 말았다. 성벽은 관계의 단절을 초래하고. 논리주의에 의한 감정의 소거는 인간성을 상실케 했다. 대면한 세계의 실상은 환멸을, 기껏 유지해 온 가치에 대한 몰인정은 추구라는 행위에 대한 회의를, 스스로의 가치 상실에 대한 자의식은 불안을, 그 불안과 괴리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은 피로를, 그러한 와중에도 페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드는 사이클의 지배는 무력한 좌절을 안길 뿐이었다.


그렇게 청년은 목적에 도달한 최후에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을 잃기 전의 모습을 떠올릴 때, 그는 그저 자유를 꿈으로만 여겼던 뭣 모를 소년이었다. 당장의 생존도 생존이지만 막연한 꿈은 순수하게 간직하던 초년생, 원형 상태의 가치와 잠재적인 열망을 아낌없이 불 지피던 청춘. 그런데 자신의 현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고만 동시에,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짊어져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So I'm back with this cliche s___
넌 pay for it
F___ respect은 됐고
이제 원해 차트 1위
I'm back with this cliche s___
넌 pay for it
I'm back with this cliche s___
넌 pay for it


우리가 시스템이 요구하는 지독한 클리셰를 따르기 시작하는 지점은 그 순간으로부터 비롯된다. 해방만을 바라던 자기 중심성의 미성숙은 시절을 지나, 책임과 그에 따른 희생이 요구되는 한국 청년의 위치에 서게 되고 이제까지 진부하다 여겨온 시스템의 질서는 다름 아닌 정설이 된다. 승리라고 믿어왔던 가치 실현과 그 증명에 대한 노력은 어느새인가 퇴색을 거쳐 패배에 대한 인정이 돼버린 것일까? 클리셰로 회귀할 것이라는 그의 선언은 즉슨 맹목성에 따라 움직이던 그들의 방식에 발맞추겠다는 의미다. 일전에 등장한 '나'는 그렇게 '그녀'가 되고 '그들'이 된다.


그것이 생존의 시대에서 클리셰로 이끈 청년 사회의 단면이 되리라.


| 사멸하는 젊음, 끝에서


부를 쌓아 올리는 질주, 그 열은 궁핍했던(순수했던) 지난날마저 모조리 태우며 부정하고 망각하도록 만든다. 자신의 업을 드높이는 말들이 떠다니지만 그것은(적어도 젊음의 막바지에는) 겨우 자신의 결핍을 감추기 위한 과장에 불과하다. 청년은 세상과 충돌하며 관계와 감정은 물론, 자신의 방향성에 대한 선택권마저 잃었다. 혹자의 입으로 '시스템으로부터의 굴복'이라 떠드는 그것 말이다. 모든 것을 이룬 듯한 그의 모습은 '프롤로그 #1'에서체념으로 이어진다.


최후에 모든 것을 잃는 젊음, 젊음의 끝에는 진정 어느 것도 남지 않는단 말인가? 이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어쩌면 당장의 목표에 치여 소홀히 여겼을 '곁'에 대하여, 다시 말해 가족과 사랑에 대한 질문을 말이다.


나지막이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어머니의 음성은 웬일로 건네는 아들내미의 안부 전화를 몹시 반기는 기색으로 역력하다. -blow-


내가 사랑을 주면
넌 뭘 팔거니
내 미래를 걸면
넌 무얼 내놓겠니
토막이 난 이름 뒤로
우린 거래를 했네
팔리지도 사지도 않을 뭐 그런 걸

다만 손을 내밀면 넌
티 없이 맑은 개가 되지

-midnight blue 中 by 안다영


이윽고 젊음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랫말은 다름 아닌 러브 송이다. 그는 사멸의 끝에서 사랑을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대중문화 속에서 울려 퍼지던 그 지겨운 노랫말들이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는 이유도 그래서일까? 사랑이 곧 우리 이야기의 결말이자 메시지였던 것일까?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허무 속에서, 그럼에도 아직 잃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한 희망이자 구원으로 다가온다. 자신을 공격하거나 이용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각자의 삶에 치여 소원해지는 끝에 결국에는 하나 둘 사라지는 와중에도, 남아있는 누군가로 하여금 자리를 지키며 손을 내밀고, 그렇게 서로가 연대할 수 있는 여지. 그렇기에 청춘이라면 사랑을 노래 부르고 예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지?


그것이 우리 방식의 청춘 찬가이자 허무를 딛고 나아갈 새로운 방향의 페달이리라.




|Outro.


탑데일리 뉴스


젊음을 장작 삼아 쉴 틈 없는 페달을 밟으며 생존한 대가. 일생에 가장 뜨거우던 시대가 한 차례 지나가고 차츰 그 열이 식어갈 즈음, 그의 흐려진 눈빛은 그러한 과정이 가져다준 끝이 '몰락'이었음을 말하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 수많은 것들을 이루어냈으면서도 그것을 비상이라 부를지, 아니면 추락이라 부를지도 모호한 청춘의 끝. 한 시대의 아웃트로에서 화자는 더 이상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정리하는 무력한(그렇기에 진솔한) 고백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과정을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그 끝은 두려워하는 약한 존재, 자신에게 자리한 흠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받아들이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그러한 자신을 인정한다. 대신 자신에게 남아있는 사랑에 대하여 긍정과 감사함을 새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오기를 기약한다. 사멸이라 부르던 젊음의 끝에서, 나아가 무기력함이 현존하는 팬데믹의 시대에서, 그럼에도 페달을 멈추지 않는 생존의 시대에서 (비록 클리셰적인 끝맺음일지언정)


- 그렇게 -

새로운 도약을 암시한다.



|Epilogue: Citrus


세상은 미쳐가 더 매 겨울 더 추워도
옆에 날 둬 주는구나
내가 손에 쥔 건 점점 더 줄어
전부 없어져도 옆에 둬 주라
벌써 갔어 한 해가
남이 두는 잣대가
신경 쓰여 자주 난
너무 약한 날 보살펴 주렴
이런 뻔한 사랑 노래가 아직은 전부야
기다려 주길 바라


치열과 냉정, 혼란만이 꿈트는 시대 속 나 자신을 이루던 것이 차츰 사라지고, 하염없이 약해져만 갈 때 우린 사랑에 의지하고 서로를 아끼자.


세상은 미쳐가네 난 여기
해가 바뀌어도 잘 살아 다만 여기
많은 떠나감이 다른 만남 사이에서
벽처럼 굳어간 나의 얼굴이 보여
난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어 엄마
집에 돌아가긴 손이 비어서 좀만
내 누나들 몫까지 등에 진 것 같아
모두 미워한 적 있어 뭐가 걱정 말아
내 숫자가 예전 같지 않아도
내 계획이 모두에게 안 닿아도
걔네가 내 걸 자기 거라 거짓말 치고
다른 곳에 가서 발 뻗고 자도
날 위로하지 말아
예전엔 위로받길 원했지만 이젠 아냐
추락은 더 높은 곳 이전의 과정이야
그리고 그땐 너도 나를 알아
결국엔 다시 돌아와 (Official Video ver.)


그렇게 많은 게 바뀌고, 예전 같지 않는 와중에도

새로운 환경이라 여기고, 새로운 출발선상이라 여기고 사멸의 끝에서 우린 잃지 않고 다시 돌아오자. 힘차게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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