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여사 이야기

결혼기념일날 파김치 담근 설여사

by 설여사

시제를 지내고 다음날 시댁에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날 아침 시댁 밭에서 쪽파, 배추, 갓, 무를 수확해 왔다.


젊었을 적 설여사는 어머님이 싸주시는 농작물들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베란다에서 썩어가다 음식물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농작물들이 많았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시댁에서 가져온 파, 마늘, 상추, 시금치, 깻잎 등등이 너무 맛있다.

설여사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평생 농사일하며 허리가 휘고 무릎관절이 닳아 잘 걷지도 못하시는 시어머니가 힘겹게 유모차를 끌고 가서 일군 밭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귀하게 느껴진다. 시어머니가 정성껏 키우신 농작물들을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더 귀하다. 그리고 시어머니 밭에서 나는 것들은 진짜로 맛있다. 그래서 요즘엔 마트에서 웬만하면 푸성퀴는 안 사 먹는다.

이젠 시댁에 가면 밭에 가서 뭐가 있나 둘러보고 수확해 오기 바쁘다.


시어머님 밭에는 한겨울에도 시금치, 파, 배추들이 심어져 있다.

어머님 밭에는 늦가을에 심어져 겨울 동안 밭에서 눈 맞고 비 맞으며 추위를 견디다 봄이 되면 파랗게 올라오는 약파가 있다.

그전엔 그 파로 김치를 담아 주셨던 것 같다. 그러다 10여 년 전부터 봄이 오면 어머님은 생파를 한 상자 가득 택배로 보내셨다. 보낸다는 언질도 없이 언제나 갑자기 도착하는 파.

처음엔 파를 다듬어서 보내시더니 어느 해부터는 뿌리째 보내셨다. 어머님의 나이 듦이 여기서도 느껴졌다.

남편과 둘이 집에 도착한 불청객 파를 다듬고 씻고 양념해서 10여 년 전부터 파김치를 담아 먹었다. 그렇게 늘 집엔 파김치가 있었고 그렇게 우리 집 아이들은 할머니가 정성으로 키워낸 약파김치를 먹으며 컸다.


해 전 다 큰 아들이 김치중에 파김치를 젤 좋아한다고 한다. 그중에 엄마가 해준 파김치가 젤 맛있단다. 설여사는 생각한다. 설여사가 파김치를 잘 담근 게 아니고 시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약도 한번 안치고 정성껏 키우신 겨울을 견디고 자라난 파가 맛있어서 파김치가 맛있다는 것을.

설여사는 파김치를 싫어한다. 그러나 아들이 파김치가 좋다는 그 한마디에 그 이후론 가을에도 시골밭에 파만 보이면 뽑아와 아들을 위해 파김치를 담근다.


이번에도 시어머니 밭엔 심긴 지 얼마 안 된 여린 파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녀석들이 또 겨우내 밭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이른 봄에 우리 집으로 올 귀한 파가 될 아이들이다.

그중에 튼실한 파를 골라 아들을 위해 질퍽한 밭에 발이 빠지는데도 파들을 낚아채서 뽑았다.

그렇게 데려온 시어머니 밭의 귀한 파가 시들까 싶어 시댁에서 돌아온 다음날 29주년 결혼기념일에 설여사는 아침부터 파를 다듬고 씻고 양념해서 주말에 올 아들을 위해 파김치를 담갔다.


결혼기념일이니 둘이 오붓이 저녁에 외식을 하자는 남편의 제의를 거절했다. 첫 번째 이유는 파김치를 담느라 설여사는 파김치가 되었고, 두 번째 이유는 맛있게 담근 파김치를 남편에게 빨리 맛 보이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설여사는 스물아홉 번째 결혼기념일날 소중한 파김치를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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