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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대둔산 산행기

by 하영일

덕유산으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하자, 산행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오늘 산행에 대한 안내를 시작한다.

현재 덕유산에는 많은 눈이 내린 상태라 구천동 계곡과 안성매표소 모두 입산 통제되었고, 케이블카로 향적봉으로 가는 길만 개방되었다는 상황을 설명한다.

대체 산행지로 민주지산과 대둔산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한다. 민주지산은 도마령 고갯길로 차량 통행이 불가하고, 13km에 이르는 물한계곡도 상태가 좋지 않아 길에 갇힐 위험이 있다고 한다.

반면, 대둔산은 상대적으로 눈이 적고, 케이블카를 통해 등산이 가능하다. 대둔산으로 가는 것이 훨씬 유리한 선택이라는 산행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대장의 마음은 이미 대둔산으로 결정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덕유산 케이블카 탑승권을 웃돈까지 주고 구입한 두 명이 있었다.

그 두 명도 산행지 변경에 동의했지만, 목적지를 갑자기 변경하는 것은 산행대장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산행대장이 등산객들을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가운데, 버스 안의 분위기는 이미 대둔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덕유산으로 가고 싶어 하는 등산객이 있을 만도 지만, 아무도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입장권을 사전에 구입하신 두 분께는 한 명의 금액을 산행대장이 부담하고, 나머지 금액은 버스에 탑승한 등산객들이 천 원씩 내어서 그분에게 드리자는 제안을 했다. 그 두 분은 덕유산 케이블카 탑승권은 못쓰게 되고 대둔산 케이블카 탑승권을 새로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덕유산에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버스를 타고 대둔산으로 가는 동안, 입산 통제가 해제되어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탑승객들이 천 원씩 내는 일은 없었지만, 산으로 향하는 동안 산악대장이 산행에 대한 명을 몇 번 더 했다.

그 사이 버스가 대둔산 주차장에 도착했고, 등산객들이 모두 차에서 렸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5시간이며, 오후 3시에 버스가 서울로 출발할 예정이다.


주차장을 벗어나자 눈 덮인 산 꼭대기 풍경이 펼쳐진다. 정상의 바위가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이곳에도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둔산에 오르는 것이 마음에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바로 향한다. 탑승장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지만, 6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대기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 덕유산에 갔다면 한두 시간 줄 서는 것은 기본일 텐데, 그나마 여기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케이블카에 20여 명 탑승하고 정상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발아래와 산 위로 보이는 경치가 온통 새하얗다. 가을의 단풍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나뭇가지와 바위 위로 하얗게 눈 덮인 모습을 보고 등산객들이 탄성이 쏟아진다.


눈앞으로 펼쳐진 산의 모습은 무척 험준하다는 인상을 준다. 이곳은 6.25 전쟁 때 충청도 지역 빨치산 활동의 본거지가 되었고, 그 이전에는 동학농민군이 관군들과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도 산세가 깊고 외부인의 출입이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우리 버스도 덕유산의 폭설에 겁을 먹고 대둔산으로 몸을 피한 셈이지만, 이곳으로 온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눈 덮인 덕유산 풍경이 충분한 보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가 산 중턱에 도착하자, 나는 아이젠을 착용하고 본격적인 산행 준비를 마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구름다리 앞에 이르니 풍경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구름다리도 멋지지만, 그 뒤로 보이는 정상 봉우리와 삼선계단이 어우러져 달력 사진에 실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구름다리
삼선계단

구름다리에 올라서자 산봉우리와 발아래 계곡 경치가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좀처럼 보기 힘든 절경을 내가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는 삼선계단이 눈앞에 나타난다. 경사 50도가 넘는 가파른 계단인데도, 등산객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다.

오늘 같은 날, 저 계단을 지나가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아 사진만 한 장 찍고 옆으로 돌아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등산객들의 모습을 보고 나도 자신감을 얻는다. 등산객들 무리에 섞여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올 새도 없이 다리가 후들거린다. 오직 앞사람의 발만 보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

가파른 계단이 무섭긴 해도 심장 쫄깃하게 만드는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다. 대둔산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곳으로 지나간다. 계단이 만들어진 지 50여 년 지났지만 여전히 대둔산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수많은 산행지 중 삼선계단만큼 가파르고 무서운 곳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삼선계단 지나고 마지막 깔딱 고개에 도달한다. 가파른 길에 눈까지 쌓여 내려오는 사람들과 올라가는 사람들이 마주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쉽게 가려는 마음에 케이블카 왕복 탑승권을 끊었지만, 이 구간에서는 등줄기에 땀이 나고 허벅지가 땡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정상이 바로 코앞이다. 정상은 등산객들로 북적이며,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사방으로 펼쳐진 경치는 그야말로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 벼랑 끝에 둘러쳐진 난간에 기대어 발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능선을 내려다본다. 조금 전에 내가 지나왔던 길을 눈으로 더듬어 보니 케이블카와 출렁다리가 까마득히 보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그 옛날 빨치산과 동학농민군은 관군들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으나, 오늘 우리는 덕유산 폭설을 피해 대둔산으로 왔다. 그들에게 이곳은 죽음을 맞이한 최후의 항전지였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더 멋진 설경을 보기 위한 행복한 선택지다.

오늘 마천루에 오른 등산객들은 눈꽃 활짝 핀 대둔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즐기고 있다. 자연이 주는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는 것은 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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