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구정(三龜停)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학가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삼십 리는 족히 될 거리지만 앞을 가로막는 산 하나 없이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학가산 정상 부근에는 몇 개의 통신타워가 서 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릴 적부터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군사용이거나 방송국 통신타워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 그 용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철탑이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세월이 흐르며 철탑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그 모습은 산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고향에 올 때마다 늘 바라보던 익숙한 산이지만, 수십 년이 지나도록 정작 그 산에 올라볼 생각은 못 했다. 학가산은 산세가 험하고 길도 멀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엔 "서울로 가는 길이 학가산 뒤로 있다"는 어른들 말을 듣고, 학가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서울을 막연히 동경하곤 했다.
국민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서울로 오가는 경기여객 버스가 학교 앞길을 지나기 시작했다.
엔진소리는 힘이 넘쳤고, 길쭉하고 세련된 외관은 시골버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그때 선생님이 "저 버스 타면 서울까지 다섯 시간도 안 걸린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서울은 학가산 넘어가 아닌 예천 방향으로 가야 닿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사실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길, 다른 하나는 학가산 뒤편을 돌아 죽령을 통과하는 길이다. 어느 쪽으로 가든 서울에 이를 수 있지만 문경새재를 넘는 길이 조금 더 가깝다.
지금은 고향에 들를 때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지만, 어릴 적 막연히 동경했던 그 길을 다니고 있는 셈이다. 고향길 풍경은 많이 변했지만, 그때 품었던 설렘과 꿈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동녘에 학가산의 정기를 받아 ~ 국민학교 시절 불렀던 교가의 첫 소절이다. 학가산과 낙동강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안동의 정체성을 담은 존재였다.
학가산은 안동의 배산(背山)이고, 영주의 앞산에 해당된다. 예천 사람들에게는 해 뜨는 산이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지만, 오래도록 발로 오르기보다 눈으로 바라보는 산이었다.
오십이 넘은 지금에서야 학가산에 오를 기회를 얻었다. 산행 들머리인 천주마을 가는 길은 온통 콩밭 세상이다. 마을 이름 '대두서(大豆西)'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콩이 많이 나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이곳이 시내버스 종점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눈이라도 내리는 겨울이라면 버스가 들어올 엄두도 못 낼 정도의 산골마을이다.
고개를 들어 산정(山頂)을 바라보니 방송국 통신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닿을 거리처럼 보인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진 안내목이 국사봉까지 2km 거리임을 알리고 있다.
철탑을 등대 삼아 부지런히 걸어보지만 수북하게 쌓인 낙엽이 발목에 척척 감기며 걸음을 붙잡는다. 인기척 하나 없는 산길이 이어진다. '산돼지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닐까?' 하는 무서움이 스친다.
그러다 '마당바위'라 불리는 평평한 바위에 이르러 한숨 돌린다. 바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다. 다시 통신대를 향해 걷는다. 길이 가팔라지고 발아래 천주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낙엽 때문에 발걸음은 두 배로 무겁지만, 고립감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쉼 없이 발검을을 옮긴다.
스산한 오솔길 끝에 방송국 건물 울타리가 나타난다. 이제 국사봉까지는 단 500미터 남짓. 등산로는 반듯한 나무계단으로 바뀌었지만, 고도가 높아진 탓에 등줄기로 서늘한 한기가 스며든다.
마침내 시루떡처럼 뭉툭하게 솟은 바위가 눈앞에 나타난다. 여기가 국사봉 정상.
바위에 녹색 철계단이 놓여있지만, 안전이나 미관은 고려하지 않은 듯 어설프게 걸쳐져 있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며, "저 위에서 바라보는 고향마을은 과연 어떤 풍경일까?" 하는 설렘이 가슴을 두드린다.
"아, 학가산은 이런 곳이었구나."
상상했던 것과 달리 평평하고 널찍한 바위가 아니다. 겹겹이 쌓인 시루떡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지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요새 같은 지형이다. 그 위에 학가산이라 적힌 정상석이 박혀 있다.
늘 멀리서만 바라보던 학가산. 드디어 오늘 그 꼭대기에 섰다.
발아래 펼쳐진 고향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으로 파고들며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아! 좋다.
고향마을 들판과 도청신도시 아파트가 아득하게 보인다. 무수히 많은 산을 다녀 봤지만, 그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뭉클한 감정이 솟구친다. 고향땅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이 기분이야 말로 감동 그 자체다.
안동 사람들 중에 학가산 국사봉 정상에서 이 경치를 본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이라도 이곳에 올라 이 풍경을 확인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가.
어린 시절 교가를 부르며 수없이 읊조렸던 그 이름 나의 '학가산', 우리의 '학가 마운튼'이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