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그 사람에 대한 로그인이다.
나에게는 거의 18살까지 키운 반려견 토리가 있었다. 토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어언 2년이 넘었다. 어느 날 토리가 꿈에서 나왔다. 꿈에서 나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내가 궁금했던 것을 토리에게 물어봤다.
토리야 너 하늘나라 가기 전에 왜 음식을 줘도 왜 안 먹었어?
토리가 답했다.
나 이빨이 너무 아파서 먹지를 못했어. 먹기 좋게 잘 분해하고 먹여줘서 고마워
그리고 꿈에서 깼다.
이 꿈이 너무 생생했고 왜 토리가 하늘나라 가기 전에 음식을 먹지 않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물론 나의 상상력이 더해진 꿈이지만 계속 의문이 든 것이 그 꿈 하나로 답이 되었다. 지금 추측하건대 그전 날밤 유튜브로 사자 이빨 수술 영상을 보고 자서 그 잔상이 꿈에 투영되어 그러한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그 꿈이 너무 생생하고 내 입장에서는 나름 의문이었던 것이 해소가 되어서 맘이 편했다. 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면 아이들이 되게 재미었하고 흥미로워할 거 같아서 수업 중 반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결과는 대 참사였다.
대략 8명의 아이들이 나의 꿈 이야기를 듣고 울어버려 수업을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다. 한 명씩 달래주다가 수업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몰려와서 나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선생님 토리는 하늘나라 가서 맛있는 거 잘 먹고 있데요?
선생님 토리는 왜 아팠아요?
선생님 토리한테 무슨 음식 주었어요?
교실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이들의 총책임자이자 관리자 그리고 보호자이다. 때문에 아이들은 나의 말 한마디 그리고 이야기 한 마디를 함부로 흘러 듣지 않는다. 나는 내가 꾼 꿈이 너무 재미 었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아이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몰입하고 공감하였다. 본인들이 토리와 18년을 같이 산 것 마냥 같이 아파주었고 같이 슬퍼했다.
그 순간은 아이들이 나에게 로그인을 하는 순간이었다. 로그인이라는 것은 공감을 잘하지 못하는 내가 만든 일종의 장치이다. 내가 관심 있어하는 상대방에게 깊숙하게 그 사람의 심정을 내가 느껴보고자 그 사람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듣고 반응하기 끝이다. 듣고 반응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가장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순간 나였다. 어떨 때는 어쩜 저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까 싶기도 한데 이런 면을 보면 어쩜 저렇게 누군가에게 공감을 잘해주는지 참 의문이다.
하지만 나는 공감을 하는 것이 서툴렀다. 서툴렀기 때문에 스스로 그러한 `로그인`이라는 일종의 대화 기술을 익힌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단 인간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나의 학생들에게서도 공감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애초에 공감할 생각도 안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사람에게 로그인을 했을 때 받는 그 감정적인 소용돌이를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나의 초자아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라고 상담받을 때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방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교사로 일하면서 아이들의 감정을 받아주고 공감을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 무수히 많이 온다. 그럴 때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듣고 반응하기가 아니라 듣고 대응하기를 한다.
듣고 거기에 대한 궁금증, 호기심, 혹은 나의 감정들에 대해서 표출하는 것이 반응하기라면 대응하기는 듣고 알맞게 대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대응을 하다 보면 나의 감정이 흔들리지도 않은 채 아이들에게 만족스러운 반응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선생님 너무 영혼이 없게 반응해요. 섭섭해요.
매 쉬는 시간마다 내 옆에 와서 쫑알쫑알 자기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다. 어느 날은 나도 너무 바빠서 그 아이의 말에 공감은커녕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나에게 저렇게 말한 것이다. 반대로 생각을 해보니 이 아이는 토리 이야기를 했을 때도 울었던 아이고 또 내가 하는 어떤 말이든지 나에게 깊이 공감해 주고 반응해 주었던 아이였다.
아무래도 많이 섭섭했었나 보다. 그 아이는 반에서 내가 본인에게 가장 큰 관심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대응하기보다는 반응하기로 아이들에게 대하고 있다.
물론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거 같다. 나는 1명이고 아이들은 여러 명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교실에서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최고 관심사가 된 다는 것은 아무래도 기분 좋은 일 같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최고의 반응을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어떤 아이에게는 최악의 반응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성장을 해야겠다. 또 하나의 숙제를 안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