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중소도시 자가에 중소기업다니는 40대 김대리이야기5

관식이랑 애순이

by 김자주

폭삭 속았수다 드라마를 보면 관식이는 정말 딸만 보고 산다. 어디 관식이 뿐일까. 애순이도 딸만 바라본다. 칭얼대는 손주 앞에서도 마음은 변함없다.

“내 딸좀 봐줘...”라면서 손주에게 부탁하는 애순이.


아내의 친할머니.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정말 아들바보이신 분. 첫 손주를 보신 후 주변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손주가 너무 이쁘다고 하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내 아들이 더 잘생겼다!”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이 상상이 갈만큼,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도 부모님이 계시다. 부모님이 어색하고 불편해진 것은 정말 오래된 것 같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는, 사실상 사춘기 이후에 단절된 것 같다.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한민국 전후세대 후진국에서 태어난 아버지의 일반적인 모든 태도들이 그래도 중진국에서 태어난 나와 많은 갈등을 빚었던 것 같다.

이런 불편함과 어색함을 간직한채 어느덧 40대 중반이 됐고, 여전히 그 마음이 변함이 없다.

그래서 실은, 본가에 가는 것이 나는 참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오히려 처가댁 가는 것이 더 편하다. 아내는 이런 내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처가댁의 형님은, 최근 결혼했는데, 아직도 본가가 편하다고 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뭐 가정마다 다 각자 분위기가 다르니, 그럴 수 있지. 어쨌든 나는 본가가 어렵고 부담스럽다.

그 구체적인 불편함의 이유를 아직도 모른채, 올해 또 나이를 한살 더 먹었다.


갑상선 저하증, 신장기능문제, 약간의 당뇨 등등 갑자기 찾아온 건강상 문제 때문에 그 좋아하던 축구를 한 3개월간 접었다가 어제 다시 축구를 시작했다.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토일 새벽 조기축구를 나간다. 선수들도 소화하지 못하는 일정인데, 그냥 그게 너무 좋다. 3개월만에 다시 나가니, 기분도 좋고, 사람들도 만나니 생동감이 있다. 질병은 답이 없다. 그냥 이렇게 몸을 굴려서 치료하는 수밖에. 사실 건강이 피지컬적 문제라기 보다는, 현재 내 상태는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 스트레스, 압박감, 자녀육아문제, 직장의 압박 등등. 정서적으로 많이 침체된 상태가 오래됐다. 이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나로서는, 정말 안좋은 방법인데, 술이었다. 술을 마시면 좀 나아진다. 기분도 좋아지고. 술을 30 후반에 시작했다. 그전에는 나는 술을 종교적인 이유로 입에도 잘 안댔다. 그러다가 고통을 해결하려고 술을 입에 댔다. 그렇게 혼술이 시작됐다. 뭐 대단한 회식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술친구가 많은 것도 아닌데, 혼술의 빈도가 높아지더니, 어느순간 주 3-4회를 혼술하게 되었다. 당연히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친한 친구가 나와 똑같은 문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었는데, 몇년 전에 소식 들었을 때는 코웃음을 쳤다. 근데, 나도 같은 상황이 되어보니, 술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고, 친구에게도 복용 약을 물어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못했다.


어쨌든 오랫만에 축구를 하다가 흥분해서인지 좀 다쳤다. 팔에도 멍이 들고, 무릎에도 멍이 들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도. 그 상태로 어제 부모님댁에 간것이다.

내가 갑상선저하증이 있는 것을 아는 아버지가 내 멍든 상태를 보시더니 슬퍼하시며 약과 밴드를 가져온다. 그리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주신다. 기분이 이상했다. 옛날에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혼나고 매를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후 미안해하며 약을 발라주시던 기억이 난다. 물론 아버지의 체벌을 용납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당시에는 정말 이해가 하나도 안갔는데, 이렇게 나이를 먹고나니,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전후 시대, 생존 그 자체였던, 쓰레기통같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아간다는 것은 정말 서바이벌이었다. 7남매 막내로 태어나 서울에 상경해서 체득된 모든 생존전략들은 사실 전쟁과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자손인 나는 전쟁통에서 자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기에, 그런 전쟁문화들을 익숙하게 경험했던 것 같다. 체벌, 폭언, 술 뭐 이런 것들. 당시에는 나도 너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고,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술에 빠져산다. 전후 대한민국은 아니지만, 이 대한민국 시스템이, 참 전쟁같다.


전쟁에서, 한번의 선택을 물릴 수 없다. 결정되면, 끝을 봐야 한다. 그리고 결정되면 뒤로 물릴 수 없다. 적이 몰려오고 있다. 사방에서. 신중해야 한다.

철없던 20대 후반, 나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인생에서 치명적인 결정을 했다. 명문대 졸업 후 나의 결정은 부모님에게도 치명적이었다. 약 3년의 시간동안 나는 푹 썩었다. 단체에서. 커리어상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는 멍청한 결정과 결과가 남았다. 그렇게 나는 전쟁터에서 실수를 연발한 자가 되어 부대원을 모조리 잃은, 경력을 완전히 잃은 사람으로 이 차가운 대한민국 채용시장에 내던져졌다.


뭐 지금은 결과적으로 좋소기업 인사팀 팀원으로 근무 중이다. 40대 중반. 내 친구들은 내로라 하는 대기업, 공기업에서 커리어 잘 쌓아서 다들 잘 산다. 그래서 나는 내 정신건강을 위해, 친구들을 안만난다. 그게 속 편하다. 정말 어렵게 만나야만 하는 순간이 되면 꼭 술을 마신다. 녀석들은 술을 안마시지만.


지난 시간 후회하지 않는다. 다 내가 한 결정이다. 그게 속이 편하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왜 부모님댁에 가는 것이 싫은지, 어제 다시 깨달았다. 미안해서 그렇다. 요새는 그 이유가 가장 크다. 부모님은, 만나면 늘 나를 머리부터 발까지 훑어보신다. 정말 부담스럽다. 아들이 잘 살고 있는지. 피곤하지는 않은지. 아프지는 않은지. 흰머리는 많이 났는지. 옷은 잘 입는지. 냄새는 안나는지. 그렇게 훑어보신다. 그게 너무 미안하고 화나고 부담스럽다. 그래서 가기가 싫다.

애순이처럼, 관식이처럼, 정말 자식만 본다.


기독교단체 떠난 후 내 첫 직장은 나이 마흔에 서울 자치구에서 운영하는 혁신교육센터 기간제근로자였다. 최저임금의 계약직이었다. 뭣도 모르고 들어갔다. 아직도 뭔가 종교뽕이 덜빠져서, 아직도 영웅심리가 남아서였는지, 마치 세상을 바꿀 것마냥 그렇게 살아가던 때. 교육으로 세상을 바꿀거라 착각하고 들어갔다. 아주 그지같은 직장이다. 정권에 따라서 지원이 커졌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센터.

지랄맞은 센터장 밑에서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주말에 업무를 하던 어느날, 차를 몰고 가다가, 정말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다. 창문을 열고 “아빠!”하고 부르고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나 지금 뭐하고 있지? 왜 이러고 있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아니면 내가 뭘 그렇게 못살아서 지금 이런 인생을 살고 있지? 그렇게 곱씹으며 운전하다가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창문을 열면서부터 본능에 의지해 밝은 표정을 짓는다. 아빠, 나 괜찮아, 걱정말어. 나 잘 살고 있어.


아빠도 밝게 웃으니 괜찮은 연기였으리라.


계약 종료 후 학원 강사를 한적도 있다. 그때도 정말 힘들었다. 원장은 나를 기계처럼 굴렸다. 토요일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시켰고, 일요일도 그렇게 일을 했다. 견디지 못하고 1년도 안돼 그만뒀다.


얼마전 아버지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씀하시더라.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걱정이 많이 됐다” 라고.


그양반 내가 아무리 연기해도, 속지 않는다. 다 알고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큰형이 청소일을 하다가 양아치에게 굴욕을 당한 후, 1층으로 내려왔는데, 엄마가 싸서 가져온 도시락이 있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툴툴대며 말한다. “오셨으면 나를 보고 가셔야죠 도시락만 주고가면 어째요” 그런데, 엄마가 말없이 아들을 보며 웃는다.


엄마도 그 장면을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동생에게 울면서 하는 장면이 있다.

딱 그거다.


그렇게 모두가 이 전쟁터같은 현장에서 눈물겨운 삶을 하루 하루 살아간다.

자녀는 부모걱정하면서.

부모는 자녀걱정하면서.


결국 나도 내 자녀들을 바라보며 그러겠지.

벌써 걱정이다. 저 어린녀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내가 경험했던 그런 학원폭력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지.

도무지 모르겠다.


차가운 겨울이다. 괜시리 마음이 시리다. 그리고 그 마음을 글로 풀어내니, 더 스산하다.

봄이 기다려진다.

작가의 이전글지방중소도시 자가에 중소기업다니는 40대 김대리이야기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