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에서 헬싱키를 보다
경기도 용인의 기아 80주년 기념식장. 정의선 회장이 단상에 올랐을 때,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의 모습에서 2013년 노키아 매각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던 스티븐 엘롭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라고 울먹이던 그 CEO의 목소리가 시공을 넘어 용인까지 흘러온 것만 같았다.
정 회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기술 격차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율주행 기술의 오작동은 곧 인명사고로 직결되고, 한 번의 치명적 사고가 브랜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목격했다. 그러나 이 '안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불안감은 무엇일까. 혹시 이것이 기술적 열세를 포장하는 수사는 아닐까.
현대차 그룹의 자율주행 여정은 사실 화려했다. 42dot 인수, 웨이모와의 협력, 모셔널과의 합작법인 설립까지. 종이 위의 전략은 완벽했고, 투자 금액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테슬라가 FSD v13으로 도심 곳곳을 누비는 동안, 중국의 바이두와 샤오펑이 로보택시 상용화를 선언하는 동안, 현대차는 여전히 "준비 중"이다.
송창현 사장의 갑작스러운 퇴임 소식이 전해졌을 때, 업계는 술렁였다. 자율주행 사업을 진두지휘하던 핵심 인물의 이탈. 이것이 단순한 인사이동일까, 아니면 내부의 깊은 균열을 보여주는 신호일까. R&D 조직 개편이 예고되었다는 소식은 현대차 내부에서도 현 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커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나는 종종 한국 대기업 R&D 전략 회의에 참석한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말로 도전을 미룬다. 메타버스가 뜨면 "거품"이라 하고, NFT가 주목받으면 "투기"라 하며, 생성형 AI가 폭발하면 "좀 더 지켜보자"고 한다. 그리고 남들이 시장을 다 선점한 후에야 부랴부랴 "추격 전략"을 세운다.
자율주행의 잔인한 진실은 이것이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데이터의 전쟁이고, 생태계의 싸움이며, 표준을 정의하는 자리를 두고 벌이는 헤게모니 투쟁이다. 테슬라 차량들이 하루에 수집하는 수억 마일의 실주행 데이터는 그 자체로 넘을 수 없는 해자를 만들어낸다. 이 데이터가 AI 모델을 학습시키고, 엣지케이스를 해결하며, 시스템을 고도화한다. 매일매일 그 격차는 복리로 벌어진다.
정 회장이 말하는 "완성도 높은 시스템"이 완성되는 그날, 과연 시장이 기다려줄까. 아니, 그때도 '자동차'라는 개념이 남아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완벽한 레벨 4를 만들어낼 때쯤, 세상은 이미 자율주행을 넘어 다른 모빌리티 패러다임으로 이동했을지도 모른다.
2007년, 노키아는 세계 휴대폰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하드웨어 기술력을 보유했고, 가장 튼튼한 휴대폰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친 것은 휴대폰이 더 이상 '전화기'가 아니라 '컴퓨터'가 되어가고 있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그들이 '품질'과 '내구성'을 강조하는 동안, 애플과 구글은 생태계를 구축했고, 플랫폼을 장악했다.
2025년의 현대차가 2007년의 노키아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안전"이라는 명분 뒤에 숨은 보수적 의사결정, "완성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기술적 지체, 그리고 "장기적 관점"이라는 수사로 정당화되는 우유부단함. 이 모든 것들이 노키아가 걸었던 그 길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의선 회장은 이날 '비전 메타버스모'라는 콘셉트카를 공개했다. 미래 모빌리티의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콘셉트카는 콘셉트카일 뿐이다. 진짜 경쟁은 실제 도로 위에서, 실제 데이터로, 실제 고객과 함께 벌어진다. 화려한 미래 비전을 그리는 것과 지금 당장 작동하는 기술을 만드는 것, 무엇이 더 중요한가.
며칠 전, 한 스타트업 대표가 내게 물었다. "한국은 왜 항상 한 박자 늦을까요?" 나는 답했다.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비판을, 그리고 변화를."
정의선 회장의 '안전 우선' 전략이 진짜 안전을 가져다줄지, 아니면 노키아처럼 역사의 각주로 남게 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기술 혁명기에 "기다림"은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포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용인에서 울려 퍼진 정 회장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그래, 안전은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안전한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다. 그리고 그런 배는 결코 신대륙을 발견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