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어깨에서 내려온 남자

시스템을 바꿔야 사람이 남는다

4년 5개월이라는 시간

한 사람이 거대한 조직을 바꾸기에는 충분한 시간일까. 송창현이라는 이름의 혁신가가 현대자동차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내려왔다. 스스로 선택한 하산이었다.

그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한참을 멈췄다.

"레거시 산업의 회사 사이에서 수없이 충돌했다"


실리콘밸리에서 온 구원자

실리콘밸리에서 포티투닷을 창업했던 그가 2020년 현대차에 합류했을 때,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하드웨어의 제국에 소프트웨어의 영혼을 불어넣을 구원자가 왔다고.

테슬라가 자동차의 정의를 바꾸고 있던 시대였다. 더 이상 자동차는 바퀴 달린 기계가 아니라 바퀴 달린 컴퓨터였다. 현대차도 알고 있었다. 변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를 불렀다.

처음엔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였다.


라이다를 버리고 카메라를 택하다

2024년 3월, 현대차 개발자 컨퍼런스.

송창현 사장이 무대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현대차 자율주행의 미래가 들려 있었다. '아트리아AI'. 카메라만으로 세상을 보는 인공지능이었다.

사실 이건 폭탄선언이었다.

현대차는 그동안 라이다에 올인했다. 레이저로 거리를 재는 이 비싼 센서가 자율주행의 눈이 될 거라 믿었다. 구글 웨이모가 가는 길이었고, 많은 전문가가 인정하는 정석이었다.

그런데 송 사장은 말했다. 이제 카메라로 간다고.

테슬라처럼.


"우리는 테슬라가 아닌데"

조직 내부가 술렁였다.

"그동안 우리가 쌓아온 건 뭐가 되는 거야?" "테슬라 따라가기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카메라 기반 자율주행은 테슬라가 10년 넘게 갈고닦은 영역이다. 수백만 대의 차에서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모으고, 자체 개발한 AI 칩으로 학습시킨다.

지금 시작해서 따라잡을 수 있을까?

더 아이러니한 건 타이밍이었다. 바로 그때 유럽의 발레오가 2000달러짜리 라이다를 500달러로 낮췄다. 라이다의 유일한 약점이던 가격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현대차는 라이다를 버렸다.


생태계 파괴종의 상륙

1년 9개월 후. 테슬라 FSD가 한국에 상륙했다. 서울 도심을 달리는 테슬라가 스스로 차선을 바꾸고 신호를 인식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충격적이었다.

'아트리아AI'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송창현 사장이 사표를 냈다.


누구의 실패인가

송 사장의 판단이 틀렸을까? 아니면 현대차 조직이 그의 혁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을까?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

이건 구조의 문제다. 한 사람의 영웅이 조직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의 문제다.


거대한 배의 관성

대기업은 거대한 배와 같다. 방향을 바꾸려면 시간이 걸린다. 관성이 있다. 수만 명이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는데, 갑자기 "이제 반대로 가자"고 하면 배는 뒤집힌다.

송창현이라는 선장은 너무 급하게 키를 돌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테슬라라는 쾌속정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여전히 같은 속도로 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미완성 다리

그의 마지막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제가 미쳐 다 이루지 못한 다리를 튼튼하게 완성시켜 달라"

다리. 그는 자신을 다리라고 생각했구나. 하드웨어의 세계와 소프트웨어의 세계를 잇는.

하지만 다리는 혼자 놓을 수 없다. 양쪽 기슭이 함께 손을 뻗어야 한다. 한쪽에서만 아무리 열심히 건설해도, 반대편이 거부하면 다리는 미완성인 채로 남는다.


반복되는 실험

이 일은 현대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수많은 대기업이 같은 실험을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중국에서, 유럽에서 인재를 모셔온다. 혁신을 기대하며.

그리고 많은 경우, 그들은 떠난다.

"보이지 않는 벽"에 지쳐서.


시스템을 바꿔야 사람이 남는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실험을 반복할 것인가.

혁신은 사람을 바꾼다고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의사결정 구조를, 평가 방식을, 무엇보다 실패를 대하는 태도를.

송창현 사장은 실패했을까?

글쎄. 그가 뿌린 씨앗이 언젠가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그가 놓다 만 다리를 누군가 이어서 완성할지도 모른다.


혁신의 소식을 기다리며

"혁신의 소식을 기다리겠다"

그는 이렇게 작별 인사를 했다.

현대차에서, 아니 한국 어딘가에서 그가 기다리는 소식이 들려오길 바란다. 누군가는 해낼 거라고, 아직은 믿고 싶다.

거인의 어깨 위가 아니라, 거인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혁신가가 나타나길.

그것이 송창현이 못다 이룬 꿈이고, 우리가 계속 도전해야 할 숙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4년 5개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한 사람에겐 지난한 싸움의 시간이었고, 한 조직에겐 변화를 거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묻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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