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서사를 다시 쓰는 일에 대하여
나는 평생 기계를 설계했다. 정확한 공차, 하중 분포, 응력 해석. 세상을 수식으로 읽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숫자보다 이야기가 더 강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의 아침은 조용하다. 연구원들이 삼삼오오 걸어 들어오고, 어딘가에서 커피 냄새가 흘러나온다. 나는 이 풍경을 20년 넘게 봐왔다. 처음엔 대우중공업 철도차량연구소에서, 그다음엔 KISTEP과 한국연구재단에서. 국가 R&D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기획을 하고 평가를 하고 성과를 관리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프랑스 INSA de Lyon에서 박사 논문을 쓰던 시절, 나는 진동 해석 모델을 붙들고 밤을 새웠다. 유한요소법으로 구조물을 쪼개고, 고유진동수를 계산하고, 실험 데이터와 비교하는 작업. 그 정밀함이 좋았다. 세상을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일. 엔지니어의 본능이었다.
귀국 후에도 그 본능은 이어졌다. PMP, PMI-ACP 자격을 따고, 국가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사람이 됐다. R&D 기획이란 결국 거대한 설계도였다. 예산의 흐름, 연구자의 역량, 기술의 궤적. 모든 것을 정렬시켜 최적의 성과를 내는 것.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는 자꾸 한 가지 사실과 마주쳤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데이터가 아니라 서사였다. 예산안이 통과되는 건 수치가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그 연구가 왜 지금 필요한지, 이 연구자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10년 후 이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설계도는 세상을 만들지만, 이야기는 사람을 움직인다. 나는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전환점은 생성형 AI였다. 처음 ChatGPT를 써봤을 때, 나는 엔지니어의 눈으로 바라봤다. "이것으로 R&D 기획 문서를 얼마나 효율화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 방향으로 많은 것을 했다. 연구동향 분석, 과제 기획서 초안, 성과지표 설계. AI는 훌륭한 도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이 기술을 다른 각도로 보기 시작했다. AI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경계. 데이터 처리와 패턴 인식은 탁월하지만,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 사람의 감정에 닿는 서사를 구성하는 것 — 거기에는 여전히 인간의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엔지니어이면서 동시에 스토리텔러인 사람이 아닐까.
'스토리엔지니어'라는 말을 처음 본 건 PROM 수업시간 이었다. 메커니컬 엔지니어에서 스토리 엔지니어로. 기계를 설계하듯 이야기를 설계하는 사람. 구조를 분석하듯 서사의 구조를 분석하고, 최적화하듯 메시지를 다듬는 사람. 그래 이거다 !!!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박사까지 하셨는데, 왜 영상이나 글쓰기로 가시려고요?"
나는 이렇게 답한다. "기계공학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조역학을 아는 사람이 다리 이야기를 다르게 본다. R&D 기획을 해본 사람이 연구자의 이야기를 다르게 듣는다. 프로젝트 관리를 해본 사람이 실패의 이야기에서 다른 것을 발견한다. 내가 쌓아온 20년의 경험은 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이야기의 재료였다.
스티브 잡스는 기술을 팔지 않았다. 이야기를 팔았다. "1,000개의 노래를 주머니에." 용량이 아니라 경험의 이야기였다. 일론 머스크는 로켓 엔지니어이기 전에 이야기꾼이다. "인류를 다행성 종으로." 공학적 사실이 아니라 인류의 서사였다.
나는 한국의 R&D 현장에서 수많은 훌륭한 연구자들을 봤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하면서도, 그 가치를 세상에 전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논문 속에 갇힌 혁신. 보고서 안에 잠든 가능성.
그것이 내가 스토리엔지니어가 되기로 한 이유다. 기술의 언어를 이야기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데이터에 감정을 입히고, 성과에 인간의 얼굴을 주는 것. 그렇게 해야 기술이 세상과 연결된다.
나는 기계를 설계했던 것처럼 이야기를 설계할 것이다. 정밀하게, 그리고 살아있게.
얼마 전 유튜브 채널 기획안을 썼다. 과학문화 디지털 콘텐츠. 국가 R&D의 우수 성과를 국민에게 이야기로 전달하는 채널. 기획하면서 처음으로 엔지니어의 머리와 스토리텔러의 가슴이 동시에 뛰는 걸 느꼈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영상을 기획하고, 누군가의 연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내 두 번째 챕터다. 메커니컬 엔지니어에서 스토리엔지니어로. 전환이지만 버림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르게 쓰는 일이다.
인생에서 서사가 중요한 것처럼, 일에서도 서사가 중요하다.
나는 이제 그 서사를 스스로 쓰기로 했다. 기계처럼 정밀하게, 이야기처럼 살아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