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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밸리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

꿈의 직장에서 깨어난 사람들

샌프란시스코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도시의 모습이 예전과 달라졌다. 팬데믹으로 텅 비었던 거리에 다시 활기가 돌아왔지만, 이번엔 다른 종류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MIT 합격 통지서를 찢어버리고 AI 창업에 뛰어드는 시대. 구글 직원이 18년 만에 회사를 떠나며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매일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시대가 왔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웹 2.0의 종말


2010년대 중후반, 실리콘 밸리는 달콤한 꿈에 빠져 있었다. 대출 금리는 바닥을 치고, 스타트업들은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르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우버로 이동하는 것이 혁신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때만 해도 가장 똑똑한 졸업생들은 소셜 미디어 회사에서 광고 알고리즘을 최적화하는 일에 매달렸다. 사람들을 더 오래 화면에 붙잡아 두는 것,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기술의 최전선이었다. '빠르게 움직이고 뭔가를 부수라(Move Fast and Break Things)'는 페이스북의 모토가 시대정신을 대변했다.


팬데믹이 찾아왔을 때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됐다. 오히려 더 가속화됐다. 사람들이 집에 갇혀 있으니 인터넷 사용량이 급증했고, 구글과 메타는 2021년 공격적으로 인력을 충원했다. 하지만 봉쇄가 해제되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선 후, 이들은 깨달았다. 너무 많은 사람을 뽑았다는 것을.


2022년 11월, 모든 것이 바뀐 날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2022년 11월 30일, OpenAI가 ChatGPT를 세상에 내놓았다. 처음엔 재미있는 장난감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상황이 달라졌다. 이 AI는 단순히 검색하고 추천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처럼 생각하고 창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리콘 밸리의 기술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모든 앱, 모든 서비스가 한순간에 구시대 유물처럼 느껴졌다. 구글 검색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페이스북 피드는 AI가 생성한 콘텐츠로 가득 찰까?


이때부터 '하드 테크(Hard Tech)'라는 말이 실리콘 밸리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앱 하나 만들어서 성공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제는 물리학, 수학, 컴퓨터 과학의 최첨단 지식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 인간을 능가하는 초지능을 만드는 일, 그것이 새로운 골드러시였다.


지도가 바뀌다


기술의 중심지도 바뀌었다. 마운틴뷰, 쿠퍼티노, 멘로파크로 대표되던 실리콘 밸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특히 OpenAI 본사가 위치한 곳은 '아레나(Arena)'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마치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콜로세움 같다는 의미였다.


Y Combinator 같은 유명 벤처 캐피털들이 앞다투어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전통적인 실리콘 밸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투자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팬데믹으로 유령도시가 된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활기를 찾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꿈의 직장에서 깨어난 사람들


가장 극적인 변화는 기업 문화에서 나타났다. 한때 '꿈의 직장'으로 불리던 구글의 마운틴뷰 캠퍼스. 무료 점심, 마사지, 세탁 서비스, 헬스장이 있는 이곳에서 직원들은 여유롭게 일했다. 20%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근무시간의 5분의 1을 자유로운 연구에 쓸 수 있었다.


하지만 AI 경쟁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성과가 강조되고, 스트레스가 높아졌다. 2007년부터 구글에서 일해온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레이첼 그레이는 결국 지난 4월 회사를 떠났다. 그녀의 말이 상황을 잘 요약한다.


"복리후생과 높은 급여 면에서는 여전히 좋은 직장이지만, 회사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예전엔 여유롭게 일했는데 지금은 모든 직원이 불안감에 떨고 있어요.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도 매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메타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초 성과 위주로 인원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AI가 일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회사들의 직원들이었다.


대학을 버린 천재들


이런 상황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미국 전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고 있다. 스탠포드, MIT 같은 명문대 합격통지서를 받고도 진학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AI 붐에 뒤처지기 전에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최근 메타의 최고 AI 책임자(CAIO)로 영입된 알렉산드르 왕도 그런 케이스다. MIT에 합격했지만 진학을 포기하고 Scale AI를 창립했다. 불과 28세의 나이에 세계적인 테크 리더가 된 것이다. 이런 성공 사례들이 더 많은 젊은이들을 대학 밖으로 끌어내고 있다.


새로운 기술 종교의 탄생


샌프란시스코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를 믿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술 종교가 퍼져나가고 있다. 이들은 AI의 안전성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2023년 샘 알트먼 OpenAI CEO의 축출을 주도했던 사외 이사들이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AI 개발은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신성한 작업이다. 그래서 더욱 신중해야 하고, 더욱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기술 발전과 안전성 사이의 줄타기가 샌프란시스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에게 미치는 파장


이 모든 변화가 멀리 있는 일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미 국내에서도 AI로 인한 산업 변화가 시작됐고, AI 도구를 활용한 업무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직장인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성과 평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AI 모델을 직접 만들지는 않겠지만, AI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AI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생산성 향상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기존의 몇 배에 달하는 실적을 내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아침 안개가 걷히고 있다. 하지만 기술 업계의 미래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분명한 것은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그 변화의 폭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웹 2.0 시대의 여유로운 분위기는 이제 추억이 됐다. 대신 치열한 경쟁과 높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하드 테크 시대가 열렸다. 이 변화의 물결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다.


출처: 뉴욕 타임스, "실리콘 밸리 하드 테크 시대 분석", 2025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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