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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함께 연구하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연구자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주인공 백강혁이 동료를 어깨에 짊어지고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장면. 황당하면서도 초인적인 그 모습이 묘하게 우리 연구자들의 일상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 기한, 끝없는 논문 리뷰, 막막한 융합연구... 때로는 정말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연구에 매달리곤 하죠.


최근 이낙준 작가님의 강연을 접하면서, AI 시대의 창작과 연구가 놀랍도록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중증외상센터'의 원작자이자 의사인 그는 이미 AI를 '24시간 대기하는 성실한 조수'로 활용하고 있더군요.


"자율신경 이상으로 생기는 증상이 뭐지?" "19세기 런던의 뒷골목 분위기를 설명해줘"


작가님이 AI에게 던지는 이런 질문들을 보며, 제가 새벽 3시에 구글 스칼라를 뒤적이며 찾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연구실의 고독, 그리고 AI라는 동료


박사과정 시절을 떠올려보면, 연구는 참 고독한 작업이었습니다.


지도교수님은 바쁘시고, 동료들도 각자의 연구에 매몰되어 있고. 특히 학제간 융합연구를 할 때는 더 막막했죠. 기계공학을 전공한 제가 바이오 분야 논문을 읽으며 느꼈던 그 답답함. 용어 하나하나를 검색하고, 개념을 이해하고, 다시 원래 논문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던 그 시간들.


그런데 이제는 다릅니다.


"최근 5년간 나노소재를 활용한 약물전달 시스템 연구 동향을 요약해줘"


제가 Claude에게 물으면, 순식간에 체계적인 답변이 돌아옵니다. 더 놀라운 건, Gemini는 관련 논문들의 링크까지 달아준다는 것. 예전 같으면 일주일은 걸렸을 문헌 리뷰가 하루 만에 윤곽을 잡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AI가 아무리 빠르게 정보를 정리해줘도, "그래서 이게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는 것.


연구자에서 연구 설계자로


이낙준 작가님은 AI 시대의 작가를 '지도 제작자'에 비유했습니다. 이야기의 뼈대를 짜고, 세계관을 설계하는 사람. 디테일한 문장과 묘사는 AI가 도와줄 수 있지만, 무엇을 왜 쓸 것인가는 오직 작가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실험을 얼마나 정교하게 수행하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어떤 연구 질문을 던지느냐가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AI가 데이터 분석을 대신해주고, 패턴을 찾아주고, 심지어 실험 설계까지 제안하는 시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AI를 활용해 수천 개의 논문을 분석했습니다. AI는 기술 트렌드를 정확히 짚어냈고, 연구 공백까지 찾아냈죠. 하지만 "이 중에서 우리나라 산업 생태계에 가장 필요한 연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제가 답해야 했습니다.


국가 R&D 전략을 수립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AI는 글로벌 연구 동향을 실시간으로 분석해주지만, 우리나라가 집중해야 할 분야를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사회적 가치, 산업적 파급효과, 국가 경쟁력... 이런 복잡한 맥락을 읽고 판단하는 것은 AI가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두려움이 아닌 가능성으로


처음 ChatGPT가 등장했을 때, 연구자 커뮤니티는 술렁였습니다.


"이제 연구자도 필요 없게 되는 거 아냐?" "AI가 논문도 쓴다는데..."


솔직히 저도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AI와 함께 일해보니 깨달았습니다. AI는 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제 능력을 확장시켜주는 도구라는 것을.


이낙준 작가님은 AI를 'Artificial Intelligence'가 아닌 'Augmented Intelligence', 즉 강화지능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정말 적절한 표현입니다. AI는 우리의 지능을 '강화'시켜주는 존재인 거죠.


덕분에 이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가 전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연구. 예전 같으면 수십 명의 연구원이 몇 년은 매달려야 했을 일을, 이제는 AI와 함께 몇 개월 만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종 판단과 해석, 그리고 정책 제언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지만요.


새로운 시대의 연구 일상


요즘 제 하루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침에 연구실에 도착하면, 먼저 AI에게 밤사이 발표된 관련 분야 논문들을 요약해달라고 합니다. 중요한 발견이 있으면 원문을 직접 읽고, AI와 함께 우리 연구에 어떻게 적용할지 브레인스토밍을 합니다.


"이 방법론을 우리 프로젝트에 적용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접근을 시도한 사례가 있을까?"


AI와의 대화는 마치 똑똑한 후배 연구원과 토론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은 제가 생각지 못한 관점을 제시해서 놀랄 때도 있고요.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인간의 직관이 필요합니다.


"이 연구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 앞에서 AI는 침묵합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 연구자들의 진짜 역할이 빛을 발합니다.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


얼마 전, 한 후배가 물었습니다.


"박사님, AI 시대에 연구자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할까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AI보다 더 많이 아는 연구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AI와 함께 더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무엇보다, 올바른 문제를 정의하고 그 문제가 왜 중요한지 설명할 수 있는 연구자가 되면 좋을 것 같아."


이낙준 작가님의 말처럼, 창의성은 단순히 무언가를 만드는 능력이 아닙니다. '무엇을 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능력이죠.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How to research가 아닌 What to research, 더 나아가 올바른 문제를 정의하고 Why it matters를 설명하는 것. 그것이 AI 시대 연구자의 핵심 역량입니다.


벽을 보고 일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24시간 함께하는 AI라는 동료가 있습니다.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강력한 도구를 활용해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연구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으니까요.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듯 무모해 보이는 도전도, 이제는 AI라는 든든한 동료와 함께라면 가능할지 모릅니다.


물론, 뛰어내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지만요.


이 글은 이낙준 작가(이비인후과 의사, '중증외상센터' 원작자)의 "AI와 함께하는 창작의 미래" 강연 내용을 연구개발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입니다.


참고: 이낙준, "AI와 함께하는 창작의 미래"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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